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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란 니트와 오늘의 운세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홧김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퇴사 의지를 밝혔을 때, 대략 서른 개 넘는 택배박스를 옮긴 뒤여서 대표들은 내가 무슨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줄 알았나 보다. 대표1는 대수롭게 전화나 받으며 지나치더니, 몇 차례 의사를 밝히자 그제야 퇴사 선포가 진심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에는 평소 무채색 범벅이던 대표2가 유달리 샛노란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항상 시무룩하게 보였던 그가 웬일로 산뜻한 옷을 입어서 기분까지 좋아 보였는지, 대표1이 늘 틀어두던 이별노래가 다시금 울리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냉랭한 대표들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만두겠다는 통보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평소의 나라면 괜한 눈치나 살폈을 텐데, 답지 않은 감정이었다. 사실 애초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나. 어차피 회사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인데.





포장 알바를 하며 전전긍긍 눈치 보는 나에게 스타트업 대표인 친구는 말하곤 했다.


- 그냥 알바인데 뭘 그렇게 까지 신경 써?


나는 완벽하지 않은 완벽주의 성향에다 타인을 과하게 의식하는 사람이어서, 그 말이 물론 이해는 되었지만 체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와 아르바이트를 구분 짓는 게 어려웠다. 친구는 말했다. 회사에서의 나는 큰 공장 속에서 돌아가는 부품인 반면, 아르바이트에서는 단발적인 소모품과 같은 존재라고. 그걸 대표들은 잘 아는데 너만 모르는 것 같다고 친구는 늘 답답해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침체되고 부담스러운 상황이 반복되자 친구의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불만이 커졌고 전부 '나 몰라라'하고 싶어 졌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아르바이트에는 큰 책임감이 없어도 된다는 친구의 말에 백 프로 동의하진 않는다. 아르바이트에도 그 나름의 주인의식이 필요한걸 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회사였으면 내가 이렇게 쉽게 관두기로 결심하지도, 퇴사 통보가 이렇게 쉽지도 않았을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회사보다 만만했다.





다만 동업해지서가 계속 마음에 걸리긴 했다. 아무렴 그간 정이 있는데, 제일 힘들 때 내가 업무에 구멍을 만드는 건 아닌지가 마치 ‘연인이 가장 힘들 때는 떠나는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인간적인 정을 붙인 건 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결심이 섰다. 나는 조금 더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대표1은 여전히 깍듯한 존댓말을 쓰며 진지하게 사유를 물어왔다. 대표2 역시 이유를 물었고, 이에 내가 자꾸만 답을 회피하자, 그는 건강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 대표들이 회사를 관뒀던 이유를 묻기에(실제론 복합적이 이유가 있지만) 건강 때문이라고 대충 답했었기 때문이다.


당장 새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야 하니 대표1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던 반면, 대표2는 끈질기게 병명을 되물었다. 겨우 취업한 회사를 그만뒀을 정도면, 그리고 하루 두 시간 아르바이트도 못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몸이 안 좋은 거냐며 계속해서 물어왔다. 깊게 파고들면 내 정신과적 병력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그저 ‘아 그냥 여기저기요’라고 웅얼거릴 뿐이었다. 이것저것 설명하기가 귀찮기도 했고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자 대표2는 내가 아무래도 심각한 암에 걸렸다는 결론을 내리더니, ‘본인이 생각보다 인맥이 괜찮아서 어디 아픈지 말해주면 도움을 주겠다’는, 고맙지만 불편한 친절을 내비쳤다. 나는 손사래를 쳤고 답을 알아내는 걸 포기한 대표2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 오늘 노란 니트를 괜히 입었나 봐요.. 오늘의 운세에서 쨍한 색은 피하라고 했는데…






확실히 대표2는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도망치겠다는 내 결정이 다시 한번 확고해졌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 대표2가 아프지 말라며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받아본 적 없는 한우 세트였다. 미안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나는 그저 곤란했다.


- 감사한데 이건 진짜 못 받겠습니다.


- 받을 때까지 계속 보낼 거예요.


- 아니에요.


- 받아요. 아니 별거 아닌데 왜 안 받아요?


대표2는 끈질기게 한우세트를 받으라고 종용해 왔다. 나는 대표2의 계속되는 호의가 호감에서 비롯된 건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나의 과한 오지랖 때문에, 방긋방긋 웃는 내 사회적 가면 때문에 오해를 샀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고, 너와의 관계는 사장과 알바생이라고 돌려 말하는 걸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선을 제대로 그어야 했다. 나는 어서 빨리 대표2의 친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대표님 그때 명절 선물 왜 다른 대표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 그냥 괜히 오해 살까 봐요.


- 저도 오해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받으려고요.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대표2는 더 이상 선물 받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심이 되면서도, 괜히 '0 고백 1 차임'의 상황을 만든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대표2에게 말했다.


- 아니면 죄송해요. 그냥 대표님들 서로 불편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 ? 저희 사이좋아요.


- ? …그런데 왜…


- 뭐가요?


- 아 보려고 한 건 아니고, 사실 제가 쓰레기 버리다 동업 해지서를 발견해서…


내가 사업의 세계를 몰라도 너무 몰랐나. 대표2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 아~ 그거 지금 뭐 신청하느라고 잠깐만 그렇게 써놨다가 관둔건데. 그래서 요즘 엄청 바빴잖아요. 대표1도 맨날 그 일 때문에 나가 있어서 힘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동업해지서는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됐었다. 필요 없어 버려져 있던 걸, 필요한 자료로 해석했다. 대표2의 말을 듣고 일순 허탈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요즘 명품업계 어렵다며 앓는 소리 하더니 사업도 나름 순항하고 있구나.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그만두는 게 아니구나. 두 사람, 티는 안내도 여전히 견고하구나.


그간의 냉랭한 기류도 설명이 됐다. 대표2가 말했듯 각자 정신없이 바빴을 것이고, 또 서로 친하기에 마음 편히 안 친해 보일 수 있는 거였다. 사실 우리는 가까운 만큼 적나라한 못마땅함을 내보일 수 있다. 마치 밖에선 좋은 사람인 척하다가, 집에서 엄마한테만 짜증 내는 철부지처럼. 그런 분위기인데 나 혼자 괜히 휩쓸려 눈치를 봤나 보다. 어쩐지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두겠다는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의향을 충분히 알렸고, 이제 2주의 유예기간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이쯤이면 포장도 즐겁고 대표들과도 가까워져 시원섭섭할 줄 알았는데, 말하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시원하기만 했다. 그저 하루빨리 후임자가 구해지길 빌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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