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외돌개, 강정마을, 김영갑 갤러리_2015년 5월
낮은 돌담은 타인도, 낮게 다니는 제비도 반갑게 맞이한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이름 모를 풀꽃이 피어 있다. 조약돌 하나에도 화산과 바람의 흔적이 있다.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 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최성원, <제주도의 푸른 밤>
절로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내 입. 그곳으로 떠났다. 제주도.
이번 여행은 가족과 함께해 더욱 뜻 깊었다. 제주의 바다는 특유의 영롱한 색으로 우리를 반겼다. 해변은 또 어떠한가. 하얀 산호모래로 뒤덮인 ‘우도 서빈백사’, 검은 모래로 가득찬 쇠소깍 옆 ‘검은모래해변’ 등 바다마다 독특한 해변을 갖고 있다. 마치 서로 경쟁하듯. ‘이봐~ 우리 바다에는 이런 해변이 있어!’
올레 7코스인 외돌개. 먼 바다를 보니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늘어섰다. 세찬 바람과 은빛 파도에 씻기며, 때로는 폭발하는 화산재를 뒤집어쓰기도 했을 바위들. 그것들이 직접 몸으로 보여 주는 세월의 더께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비경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무엇에 홀린 듯 아래 바다까지 내려갔다. 더운 날씨에 아이를 안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건 쉽지 않았다. 드디어 도착.
에메랄드빛의 그것을 처음 본 4살배기 아들이 환히 웃는다. 그러고는 눈에 불을 켜고 돌멩이를 찾는다. 조약돌부터 좀 큰 짱돌까지... 그리고는 신나게 물에 던진다. 아내 역시 조용히 곳곳의 비경을 눈에 담는다. 나는 동심으로 돌아간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큰 바위들로 둘러싸인 이 곳엔, 자연스레 연못이 생겼다. 이 작은 곳엔 각종 생물이 살고 있었다. 작은 소라게, 고동, 게, 보말, 쉽게 볼 수 없는 불가사리까지. 작은 생태계를 이루는 이 곳. 각자의 영역에서 양보하며, 서로 도우며 이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바다를, 그 바닷 속의 질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바다를 떠나 우리가 향한 곳은 ‘강정마을’이었다. 해군기지가 건설되려 한 곳이다. 이 곳은 산호 등 천혜의 자연을 갖고 있다. 기지가 생길 시 자연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주민들은 계속 반대해 오고 있고, 물리적인 충돌도 많았다.
‘죽이는 건 쉬워도 되살리는 건 불가능’
‘강정의 평화는 민중의 평화입니다’....
마을 어귀부터 해군기지 건설을 막는 각종 현수막이 보인다. 낡고 군데군데 찢어진 현수막을 보니,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해 온 주민들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마을 곳곳에는 검은 정복의 경찰들이 보여 긴장을 자아낸다.
마을 중심의 ‘강정평화책마을’에 들렀다. 제주와 강정마을이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길 염원하는 작가들과 시민들의 정성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다. 특히 평화를 기원하며 전국에서 보내온 책들이 눈길을 끈다.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티 없이 웃고, 어르신들은 한적하게 거리를 다니신다. 이들에게 왜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냐며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평화로운 이들을 투사로 만들었을까.
즐거운 여행 도중, 잠시 나도 얼굴이 굳어진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개발’이라는 한 가지만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모습이 안타깝다. 지금 내 곁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마다 환성을 지르는 아들이 있다. 이 아이가 커도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을까. 아이가 또 자신의 아이에게 자연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타지인이었지만 제주도에 매혹되어 섬에 정착.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억새 등 제주도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하지만, 루게릭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고, 초등학교 폐교에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갤러리를 만든다. 투병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지난 2005년, 고이 잠들어 그의 뼈는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바로 사진가 김영갑의 이야기. 그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두모악 갤러리를 찾았다.
‘사진’ 하면 갖는 편견이 있었다. 실물, 실제보다 못하지 않느냐는 것. 하지만, 그가 찍은 사진은 내가 눈으로 봤던 제주를 더 아름답고 실감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아마 피사체에 대한 작가의 뜨거운 구애가 그런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풍성한 열매를 기뻐하지도, 우쭐대지도 않는다. 열매는 사람, 곤충, 새들의 몫이다. 아낌없이 모두 나누어주고 나무는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투병중이던 김영갑 선생의 글이다.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진을 찍는 예술가에게 근육이 굳어간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같았으리라. 그럼에도 그의 창작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을 찍고, 갤러리를 만들기 위해 여생을 불태웠다.
김영갑. 그를 잘 모르지만, ‘열정’이라는 단어를 그에게 붙이고 싶다. 문득 나의 ‘일상’이 생각났다. 지금 허상과 헛된 욕심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나. 마지막 불꽃까지 사르며 살던 그를 떠올리며 부끄러웠다.
눈이 따갑도록 따스한 햇살, 영혼까지 맑아지는 바다,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부드러운 바람, 제주도의 그 아름다운 자연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다시 살아가야겠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의 후회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