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사전#9 샴푸 / 쉴 수 없는 길 위에서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샤워기 호스에서 나오는 물에 머리를 적시고, 매일 그래왔듯 자연스레 샴푸에 오른손을 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샴푸가 잘 안 나온다. 몇 번이고 눌러 평소 양보다 절반 정도를 간신히 짜내, 머리를 마저 감을 수 있었다. ‘이따 샴푸 좀 더 채워놔야겠네’ 생각하며 급히 집을 나섰다.
며칠이 지난 후.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노래 한 곡이 나왔다. 20대 초반의 참가자가 부른 노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곡이었다. 윤종신의 <탈진>.
푹 주저앉아 꿰매고 있어
너덜너덜 해진 나의 상처를
어떻든 가야 하지
쉴 수 없는 길 위에 있잖아
힘이 넘쳤던 그때 출발점에서
나를 믿어줬던 따라줬던 눈동자
이제 달라진 걱정과 불안의 눈빛
몰래 한 땀 한 땀 상처를 메꾸네
노래가 흐르는 2분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멈춰 있었다. 지금의 나를 보고 만든 노래 같았다. 상처가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출근해야 하는 나. 잠깐이라도 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나. 힘이 넘쳤던 2,30대와 달리 쉬고만 싶은 40대의 나. 혼자만 생각하면 됐는데, 이제 가족을 생각해야 하는 가장인 나.
갑자기 다 써 버린 ‘샴푸’가 생각났다. 다 떨어져서 간신히 눌러야만 나오는 샴푸. 그것과 내 모습이 겹쳤다. 내가 그 샴푸 아닐까.
모든 게 해 볼만 했던 넘치는 자신감, 실패한 뒤에도 언제든 도전할 수 있었던 용기,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했던 배려, 일주일에 이삼일은 밤을 새도 끄떡없었던 몸, 당장의 이익보다 먼 훗날을 생각했던 지혜....
이제 이것들은 내게서 찾을 수 없다. 간신히 누르고 눌러야 ‘조금’ 나올 뿐. 그나마 나오면 다행이다. 탈진된 내 모습을 그저 유지하며 살아갈 뿐. 그래도 샴푸는 다 떨어지면, 다시 보충할 수 있다. 100번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보충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누가...? 내가 넘어지면 누가 나를 일으키고, 내가 떨어지면 누가 나를 보충해 주나... 노랫말처럼 날 믿어주고, 날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라도...
좀만 아물면 좀 숨만 돌리면
날 그 때처럼 믿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