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써야겠다는 중년의 출사표
에세이를 써야겠다. 새해 벽두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다짐을 한 이유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에서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재야에 숨어있는 대가를 이제야 뵙네요. 쓰다 버린 에세이 몇 편이라도 주시면 저희가 출간하겠습니다. 이미 백만 부는 목표로 잡아놨습니다. 부탁드립니다.”라며 읍소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냥 쓰고 싶어졌다. 평소처럼 아침에 장사하고, 거래처에 가서 빠진 물건을 해 가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도 시도 아닌 에세이. 기분이 좋아졌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봄직한 광경인 ‘손뼉’을 쳤다(물론, 빨간불에 걸려서 정차했을 때). 주위의 차들과 곳곳의 CCTV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유레카” 외치고 싶었다.
에세이를 써야겠다는 하늘의 계시는 이 정도로 하고, 논리적으로 왜 쓰고 싶은지 설명해야 하는데, 내가 원래 감성적인 사람이어서 그건 뺀다. 순전히 한 사람 때문이다. 최민석. 잘 모를 것이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의외로 첫 번째로 나온다. 소설가다. 한껏 멋부린 프로필 사진을 올린 이가 그다. 이런, 나이도 나와 같다. 그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힌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소설 <능력자>를 예전에 읽었는데, 대충의 줄거리는 고사하고 인물의 이름과 배경 등 한줌의 기억도 없다. 이 사람은 읽고 나서 다 까먹어버리는 마법의 가루를 책 곳곳에 뿌려, 결국에는 한 권 더 사게 하는 심보(고도의 상술?)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그의 에세이는 어떤가. <베를린 일기>. 왠지 류승완의 영화 <베를린>이 생각나는, 비장하고 11월 같이 으스스한 느낌의 글을 기대한다면, 완전히 헛다리짚었다.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고 웃기다. 내용은? 솔직히 말해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음... 이 사람 책은 다 왜 이렇지...? 정확한 내용은 기억에 나지 않아 사람에게 책 소개를 해 줄 순 없지만, 그럭저럭 에세이를 잘 쓰는 작가라는 건 그때 입력되었다.
그의 에세이를 모은 책 <꽈배기의 맛>과 <꽈배기의 멋>을 최근에 읽었다. 책 제목이 꽈배기의 맛과 멋이라니... 무슨 전통 시장 홍보책자인가. 아니면 <한국의 전통적인 맛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의 브로슈어 같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책제목을 생각해내기 힘들어서(귀찮아서) 똑같은 류의 제목을 적은 건 아닌가. 이게 제일 심증이 간다.
헷갈리는 제목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제대로 된 에세이책을 한 권(아니 두 권) 발견한 것이다. 상당히 재미있다. ‘에세이’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전에는 머뭇거리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경>, <수탈된 대지(라틴아메리카 5백년사)>를 요즘 읽는데, 잠깐 머리 식히려 읽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물론, 저 책들을 읽은 적은 없다). 이제는 “에세이는 읽는 맛이 있어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꽈배기의 맛을 아는가(오잉, 갑자기?). 이영자가 바로 옆에서 맛깔 나는 설명을 십 분 넘게 해준다고 해도 머리를 갸웃댈 것이다. 그럴 땐 직접 먹어봐야 된다. 그때서야 머리를 주억거릴 수 있다. ‘아, 이런 맛이구나.’ 이 책도 마찬가지. 한번 읽어보라(어라. 이 사람 제목 잘 지었네?).
그렇다면, 읽기만 하면 되지, 왜 쓰냐고 묻는다면 “노트북이 있으니까 씁니다.”라고 재수 없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에세이는 다른 글에 비해 비교적 쓰기 쉽다(쉽다고 해서 잘 쓴다는 건 아니다. 슬프다). 무엇보다 소재가 넘쳐난다. 이렇게 ‘에세이를 쓰겠다는 것’ 자체로 현재 원고지 9장의 분량이 채워졌다. 대단하지 않나. 시간으로 보자면, 3~40분 남짓. 그것도 온전히 집중하지 않았다. 한 휴양림 인터넷 예약을 했고, 세 명의 손님을 맞았다. 카톡도 여러 번 했다. 에세이니까 가능하다. 소설이면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야기에 나 같은 산만한 스타일로서는 불가능하다. 시도 그렇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고르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다른 전문서적은 더 그렇다.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나의 마음상태에 대해서 2박 3일 늘어놓을 수 있고(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야구팀에 대해서도 우승하지 못한 십 수 년에 대해 울먹이며 쓸 수 있다(우승을 밥 먹듯 하는 팀을 좋아하는 팬의 마음은 어떨까). 그뿐인가? 내성발톱이나 치질, 변비에 대해서도 쓸 수 있다(신기하게 올해 세 질병이 다 걸렸다. 삼재인가). 삼라만상이 글의 소재가 되다니. 얼마나 은혜로운가. 노래가 절로 나온다. ‘에세이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소재가 이렇게 넘쳐나기에 꾸준히 쓸 수 있는 게 에세이다. 단, 단서가 붙는다. ‘내가 정신을 차린다면’. 그렇다. 항상 내가 문제다. 아무리 오성호텔 최고급 셰프가 몇 시간동안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정성껏 구워 내 앞에 대령한다 하더라도, 먹어야 된다. 한 조각이라도 먹어야지 내 살과 피가 되고, 경험이 되고, 누구한테 먹었다고 자랑할 수 있지 않나. 소재가 널려 있고, 쓸 시간도 있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죄악이다(라고 쓰는데, 안 쓰고 있던 숱한 날이 생각나 회개한다).
‘에세이는 일기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에세이와 일기는 무엇이 다른가. 나도 여기서 조금 헷갈린다. 반달가슴곰과 배추흰나비처럼 완전히 다르다면 명확히 구분해 말할 수 있겠는데, 에세이와 일기는 닮았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일기는 꼭꼭 숨겨야 된다는 것이고, 에세이는 다른 이에게 알려도 된다는 것이다. 에세이에서 내 이야기를 마구마구 늘어놓을 수 있다. 반면, 굳이 내 이야기를 안 써도 된다. 그게 좋다. 왠지 일기는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에세이는 약간의 가면을 쓴 듯하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글(언어도단 아닌가). 그게 에세이다. 그렇기에 쓸 수 있다.
쓰다 보니, 에세이 못 써서 죽을 것 같은 노인의 출사표 같은 글이 되어 버렸다. 에세이가 원래 그렇다. 자기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삼천포 빠진다고 하나. 매끈하지 못한 글 솜씨를 감출 때에도 좋다. “이건 에세이니까 원래 그래요. 모르셨어요?”라고 말하면 끝.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에세이를 쓸 것이다(응? 서론도 그랬다고?). 다음 번 주제는 ‘소설’이다. 엥? 에세이 실컷 쓴다고 주절대더니 소설? 이게 바로 에세이의 맛이다.
덧붙여서, <꽈배기의 맛>과 <꽈배기의 멋> 두 책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헉. 갑자기 소름. 두 책은 실은 같은 내용 아닐까. 제목과 표지만 다른. 그러면 곤란합니다. 최민석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