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어온 소설 (1)
두 번째 에세이를 쓴다. 뭐든지 두 번째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처음은 멋도 모르고 하게 되는데, 두 번째는 쉽지 않다. 가수들이 2집을 낼 때가 왠지 힘든 것 같다 말하고, 야구선수들이 2년차일 때 슬럼프를 겪지 않나. 전문 용어로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한다(잘난 척은). 뭐, 첫 번째 글이 문학잡지에 실리고,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 씨가 인용해주지 않았기에 이 글을 다시 첫 번째 글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나는 평생 첫 글을 쓰는 셈 아닌가(이렇게 말하니 오글대지만 좀 멋있다).
어쨌든, 두 번째(첫 번째?) 에세이는 ‘소설’에 관해 쓰기로 한다. 저번 글에 나 스스로 정했다. 아무도 기억 못하므로 다른 소재의 글을 써도 되지만, 딱히 생각나는 소재가 없어 소설로 밀어붙인다.
내가 처음으로 소설다운 소설을 읽어본 적은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무려 <대지>. 그 당시는 사회 전반적으로 소설, 그중에서도 고전을 읽어야 된다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어린 나도 두꺼운 <대지>를 읽었을 정도니까... 수십 년 전이라 자세한 내용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재미있던 것 같다. 스토리가 내게 흘러와 나를 훑고 지나가는 듯 했다. <죄와 벌>도 읽었다(우와, 대단한 걸). 그땐 나름 문학청년(아니 소년?)이었나 보다. 지금이라면 사 줘도 손사래 칠 책을 스스로 읽어냈으니까.
그 책 이후로, 남은 중고등학생 때는 초등학생 때보다 책을 덜 읽었다. 몇 권 덜 읽은 게 아니라, 아예 책을 안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왜 갑자기 독서량과 책 읽는 열정이 줄었는지 의문이다. 그때 많이 읽었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건 또 모르겠다. 역사는 만약이 없으니... 어쨌든, 그때도 다행히 몇 권의 소설은 읽었다. <성채>, <빙점> 등의 읽기만 해도 삶이 성화되는 듯한 소설도 맛보았고, <쥬라기 공원>, <코마>를 읽으며, 진짜 영화를 보는듯한 짜릿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 책읽기, 그 자체가 오락이 되는 시절이었다.
시드니 셀던(이름이 진짜 소설가 같다)의 소설을 읽으며, 어른들 세계의 배반과 음모, 유혹을 엿보기도 했다. 가끔은 야하기도 했다. 아, <퇴마록>을 빼놓을 뻔 했다. 친구에게 빌려서 읽었다. 요즘 ‘순삭’이란 말이 있다.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순간 삭제’된다는 말이다(왜 이렇게 말을 줄이는지). 그 당시에 이 말이 있었으면 퇴마록을 읽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마치 내가 그 페이지로 소환되는 듯했다. 그래서였나. 읽고 가위가 눌렸다. ‘나도 퇴마 의식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무협지’쪽으로 관심 가던 나를 스스로 막았으니 난 순진했던 걸까.
그 당시 제일 기억에 남았던 책은 얼마 전에 재출간된 <앵무새 죽이기>였다.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사랑스런 앵무새를 죽이다니. 얼마나 동물보호법과 상반되는가. 다행히 제목과는 달리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종차별을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어찌 보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속의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인종차별이 왜 나쁘고, 왜 하면 안되는지’라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책보다 이 책이 내게 인종차별의 나쁜 점을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얼마 전, 재출간되어 반갑게 다시 읽었는데, 그때의 감동은 신기하게도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때가 주인공 ‘핀치’의 나이와 비슷해서 그땐 더 공감이 갔었나보다.
계속 나가면 서평이 되기에 다시 방향을 튼다. 대학교 때는 더 책을 안 읽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하거나 취업 준비에 목숨을 걸었던 건 아니다. 그때 나는 뭘 했지? 무슨 소설을 읽었지? 하며 몇 분을 멍 때리다가 갑자기 확 생각이 났다. 그래. <토지>를 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지 1부. 재미있었다. 아까 <대지>가 외국의 이야기라면, <토지>는 우리 이야기라서 더 실감났다. <전설의 고향> 같은 섬뜩함도 있었고, 대하드라마를 보는 맛도 있었다(그래서 몇 번이고 드라마로 만들었나보다). 무엇이든 끝을 못 내는 나의 고질병 때문에 2부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1부 1권을 서너 번이나 읽었다(참고로, <로마인 이야기>는 1권만 5번). 몇 년 전, 하동 최참판댁에 갔다. 소설 속 무대이지만 반가웠다. 용이, 함안댁, 영팔이...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실제 인물을 만난 것처럼 신기했다. 5권까지 다 읽었어야 했는데... 다시 읽어 볼까, 하다가도 다시 1부만 읽을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아, 나의 전공 때문에 (원치 않던) 소설도 몇 권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부터 해서 <세일즈맨의 죽음>, <황무지>(시이지만, 소설 같았다. 왜 이렇게 긴지), <The Catcher in the Rye(이건 무려 원서로 읽었기에 영어로), <암흑의 핵심>에 이르기까지... 영문도 모르고 들어간 학과에서 영문도 모르게 책을 (강제로) 읽었다. 그래도 몇 권이라도 읽을 수 있어서 딱 그 학교, 그 학과를 갈 수 있는 수능 점수를 받아서 다행이다(그런가).
이제 30대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20여 년의 소설사를 써야한다고 생각(아, 나 오래 살았다)하니 갑자기 아찔해졌다. 그래서, 남은 20년은 다음으로 넘긴다(이것이 또 에세이의 묘미). 이렇게나마 나의 소설사를 적어 보니, (나 스스로) 재미있다. 분명 다른 종류의 책도 읽었을 텐데, 소설이 제일 많이 기억이 난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인가.
다른 책벌레들에 비해 턱도 없이 책을 조금 읽었고, 그나마 읽은 책도 대부분 내용을 까먹었지만, 그 당시에 읽었던 책으로 인해 인생은 조금은 더 풍요로웠을 것이다. 아무 목적 없이,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그저 책을 읽었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