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내가 제일 잘 한 결정
올해도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렸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던 점심메뉴부터 크게는 내 인생, 아니 우리 가족의 앞날을 바꿔나갈 결정까지... 올해 나는 큰 결정을 내렸다. 무엇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문구점을 해 온지 며칠 후면 5년차가 된다. 활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리는 성격이기에 서비스업이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차차 스트레스도 쌓여갔고,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일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문구점을 하기 전의 꿈인 ‘책 편집’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답이 없었다. 이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느린 나이(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내겐 허용되지 않아 보였다)가 되어 버렸고, 별다른 경력이 없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내가 뽑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나를 확 사로잡는 꿈이 생겼다. 바로 책방을 하는 것이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동네책방! 많은 책에 둘러싸인 곳에서 책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 세상 어떤 일보다 나와 맞는 일이었고,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지금처럼 억지춘향으로 가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책방에서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 한다 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열심히 살 것 같았고, 수백 배는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꿈이 생기니 좋았다. ‘난 과학자가 될 거야. 난 의사가 될 거야.’ 라고 첫 꿈을 꾸었던 어린아이처럼 마냥 좋았다.
아내는 부정적이었다. 아무래도 재정이 걸렸다. 책 판매만으로는 안 되니까 전시회나 강연, 각종 모임 등을 통해 얻는 부수입을 생각했다. 커피 판매도 당연히 생각했다.
조금씩 액션도 취했다. 여행을 가면, 항상 지역의 동네책방을 방문했다. 책방의 장단점을 빠르게 스캔했고,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사장님에게 책방 창업과 운영의 노하우를 묻기도 했다. 커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드문드문 연락했던 지인에게 SOS를 요청해 대충이나마 커피를 내리는 법과 카페 운영에 대한 생각을 듣기도 했다.
조금씩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책방의 컨셉도 잡았고, 책방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어떤 책을 들여놓을지 리스트도 작성했다. 어디가 좋을지 장소도 몇 곳 물색했다. 이제 창업하면 된다. 저기 희미하지만, 장밋빛 희망이 보였다.
그러던 중, ‘책방이 과연 내 길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때문이다(책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한 동네책방에서 책 한 권을 샀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읽는 것과 파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서점 하면 책 팔아서 월세 내야 한다.
단지 책을 읽는 게 좋은 것이라면 직장 성실히 다니면서 취미로 독서하길 권한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
특별한 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낙인이 찍히듯, 내 마음속에 확 자리 잡는 게 아닌가. ‘현실적인 고민’이라는 부분에 오래도록 눈이 갔고, 마음이 갔다.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매달 갚고 있는 은행 대출금도 헤아려봤고, 내년이면 초등학교 가는 아이의 교육비도 타진했다. 조금씩 늘고 있는 병원비, 갑자기 목돈이 드는 자동차 수리비 등의 비정기적인 지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동안 주로 받기만 했던 양가 어르신들에게도 용돈도 더 신경 써야 했고, 나와 아내의 노후자금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뿐만 아니다. 동네책방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지만, 그만큼의 폐업 소식도 들려왔다. 손님이 많고, 잘 알려진 책방마저 젠트리피케이션과 극감하는 매출 등으로 위태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책방을 해야 하는 꿈을 따라야 하나?’ 라는 갈등 속에 또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찾았다. <파이 이야기>. 이미 두어 번 읽다가 포기한 책이었다.
예전보다 술술 읽혔다. 파이의 유년 시절과 캐나다로 이민 가는 도중에 폭풍우에 배가 뒤집힌 부분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파이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중, 이 문장을 발견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하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망망대해에 떨어진 주인공 파이. 게다가 그의 곁엔 언제 자기를 잡아먹을지 모르는 호랑이가 있다. 파이는 구조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상상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갑판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파이가 선택한 것은 ‘당장 하는 일’이었다.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이후 파이는 호루라기로 호랑이를 길들이고, 낚시를 해서 먹을 것을 구하고, 물을 구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파이는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었고, 때로는 바다의 멋진 낭만을 경험했다. 끝내는 생존했다.
그때만큼은 파이가 내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냐고. 너는 지금 너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냐고.
나는 게으른 희망을 품고 살았다. 당장 내 앞에 놓인 삶을 만족하지 못하고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었다. 책방은 지루한 삶을 던져 버리기 위한 도피처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책방을 창업해 운영하다가 나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면, 매출이 여간해서 오르지 않는다면, 출판사나 공급업체와 갈등이 생긴다면.... 나는 어떠할까. 또다시 다른 길을 기웃거릴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책방 운영하는 것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낭만은 독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때, 책방을 하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접었다. 신기했다. 거의 몇 년간 꾸고 구체화시켰던 꿈을 한순간에 포기할 수 있다니....
책방을 포기했지만,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밀쳐 두었던 책을 펼쳤다. 글도 다시 썼고, 여러 매체에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에세이도 그 일환이다.
며칠 후면 해가 바뀐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하는 일도 매한가지이고, 매출도 비슷(하면 다행이지만)할 것이고,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년에 기대감이 생긴다. 몇 년 만의 기대감인지... 기대감은 내 사전엔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때로는 낭만도 꿈꾸지만, 우선은 현실을 직시하고 싶다. 낭만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게 진짜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