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항해사 김승주 Aug 01. 2019

배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날 위협한다

사실 흔들리는 건 사람뿐

흔들리는 배 안에서

의자, 책, 스탠드가 날아온다면



항해를 하다 보면 피할 수 없이 태풍, 파도를 만나게 된다.

그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면 주변 사물 전부가 위험 대상이다.


철로 된 손잡이가 갈비뼈를 부셔버릴 수도 있고 냉장고, 책상, 날카로운 물건들이 흉기가 되어 나를 향해 돌진할 수도 있다. 배에서의 태풍은 진도 8 이상의 지진과 태풍을 동시에 겪는 것과 맞먹는다.


날씨가 안 좋아질 조짐이 보이면 선원들은 본인들 방의 물건부터 고정한다. 흉기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상자에 넣어서 바닥에 둔다. 배에 있는 가구들은 이미 배가 요동칠 것을 대비해 만들어졌다. 개인 침실만 보더라도 냉장고는 경칩으로 잘 고정되어 있으며 전화기, 스탠드도 고정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책꽂이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가로로 꽂는 막대로 고정한다. 의자는 책상 아래에 단단히 고정해놓을 수 있다. 또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구에 틈이 없다. 보통 가정집의 소파나 침대에는 다리가 있고 아래에 틈이 있어서 먼지가 쌓이거나 조그마한 물건들이 굴러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배에 설치된 가구에는 틈이 없이 막혀 있어서 물건이 굴러 들어갈 염려가 없다.



고정되거나 바닥에 틈이 없는 가구들



흔들리는 배 안에서 고정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이제 잠을 청할 수 있다. 뱃멀미를 하지 않는 것은 가히 축복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맞다. 흔들릴때 사람은 더 준비하게 되고 강해진다.


바다가 흔들어댈수록 우리의 극복 의지는 더 강해졌다.



태풍을 만난 순간


말레이시아를 출항해 말라카 해협을 지나 싱가포르로 나올 때까지 선장님의 최대 관심사는 태풍이었다. 필리핀 동부에 발생한 TD* 때문에 선장님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바다를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TS**로 발달하고 말았다. 태풍은 필리핀 서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Tropical Depression. 약한 열대저기압으로 태풍 전 단계.

** Tropical Storm. 열대폭풍, 일명 태풍.)


선장님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싱가포르를 출항하기 전까지 기상 관련 사이트를 계속 확인했다. 필리핀에 붙어가는 것이 나을지, 베트남에 붙어가는 것이 나을지 고민이었다.


필리핀 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처음 만나는 태풍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 동부에서 또 다른 태풍이 서향하고 있어, 자칫하면 두 태풍 사이에 갇히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베트남으로 붙어서 가면 두 번째 태풍은 걱정 안 해도 되지만 첫 번째 태풍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첫 번째 KAI-TAK 태풍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남하하기 시작했다. 선장님은 필리핀에서 항로를 틀어 베트남 쪽으로 바꿨다. 태풍이 싱가포르 쪽으로 남하하기 전에 우리 배를 베트남 연안을 따라 빠르게 통과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싱가포르를 출항하자마자 우리 배는 평소보다 속력을 높였다.



출항한 지 이틀 뒤, 바다가 사나워지고 백파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인 흔들림이 시작되었다. 바로 눈앞에 족히 건물 3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성난 파도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고꾸라졌다. 하늘이 흔들렸고 성난 바람 소리가 허공에서 파도와 섞이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갈퀴를 세운 파도는 배를 넘어오려 아우성이었다. 한 번씩 뱃머리에 제대로 맞으면 강철이 찢기는 파열음이 났다. ‘쾅’하는 충격과 함께 부르르 갑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일순간 파도가 20미터 이상 솟구치더니 그대로 갑판으로 고꾸라졌다.


문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도 엄청났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으면 소름끼치는 사람 목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는데, 그와 비슷했다. 풍속 40노트, 약 20m/s의 바람이었다. (풍속 17m/s 이상이면 태풍이라고 한다.) 바다와 하늘밖에 없어 그 어떤 보호막도 없는 이곳에서는 바람의 힘을 온전히 받아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람이 세지면 바람이 만들어내는 파도도 강해진다.


결국 큰 사고 없이 태풍을 지나긴 했지만, 이 거대한 배도 바다 위에서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또 느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들 자연의 힘 앞에서는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를 타며 무수히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더 겸손해질 수밖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