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항해사 김승주 Jul 29. 2019

도망칠 수 없어서 힘을 냈다

도전은 당연히, 너무 두렵다


처음으로 배를 본 순간


몸을 사뿐히 띄워줄 만큼의 여린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다. 


시계는 점심을 가리켰지만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정오의 해를 가려 파도도 잿빛으로 흐렸다. 열두 시간을 날아와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간판만 호텔이라 적힌, 현지인들을 위한 싸구려 여관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리랑카의 어느 시골마을 선착장이었다.


선착장에는 작고 낡은 어선들이 빼곡히 정박해 있었다.

선착장의 끝자락까지 가도 내가 찾던 배는 보이지 않았다.히 두


‘분명 큰 배를 탄다고 들었는데.’렵다


첫날 공항에서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차는 비포장도로로 진입한 후로는 인적이 드문 마을로만 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길은 험해졌고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느라 손바닥, 엉덩이와 등짝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뿌연 모래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는 금방이라도 퍼져버릴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바퀴는 멈추지 않았다. 창밖으로 사막을 연상케 하는 눈부신 모래길과 이국적인 열대 야자수의 행렬이 내가 낯선 땅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실습항해사 신분으로 선장님을 따라 승선지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처음 배를 탄다는 흥분된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이동하는 동안 풍경만 응시했다. 내 옆에는 필리핀 부원도 세 명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선장님을 선두로 실습실기사, 나, 부원 셋 이렇게 총 여섯 명이 작은 엔진을 단 낡은 배에 올라탔다. 


쿨럭거리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엔진이 제대로 걸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일행을 태운 보트는 물가를 떠나 순식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보트는 물살을 양쪽으로 가르고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앞으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기분 좋은 파도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선장님도 머리를 내밀고 힘들어 할 정도였으니 오죽했으랴. 당시에는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참아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There!”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순간.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낮게 깔린 희끗한 안개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병풍처럼 서 있었다. 보트가 가까이 접근하면서 시야가 걷히기 시작했고, 이윽고 눈앞에 상상을 초월하는 배가 나타났다. 배라기보다는 섬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갈색의 강철로 된 표면 위에 붉은색 글씨로 무언가 써져 있었다. 물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 압도적인 거대함이란. 마치 하늘까지 닿아있는 탑의 시작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파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은 


‘내가 탈 배다. 이 녀석이!'



크기에 압도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배의 존재감을 전달하는 요소는 크기만이 아니었다. 이 안에는 수많은 화물들이 선적되어 있다. 화물은 누군가의 기대이자, 꿈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누군가의 꿈과 생명이 오롯이 이 공간 안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다물어지지 않는 입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망칠 수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열두 시간 비행을 한 뒤였고, 눈앞의 바다 위에는 나를 기다리는 배가 꼿꼿이 정박해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기에 맹렬한 기세로 뛰어올랐다.




두렵지 않다면 도전이 아니다


배 위에 오르자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또 다른 그림이었다. ‘끝내준다’는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낡은 배 위에서의 울렁거림,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 배는 두려움인 동시에 물러설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 운명이 눈앞에 있었고 난 그 배에 올라타야만 했다.


단언컨대, 어떤 일에 도전할 때 두렵지 않다면 그건 도전이 아니다. 도전의 크기는 곧 두려움의 크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전하는 자는 두려워하는 자이고, 두려움은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 



스스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환경 속으로
자신을 던질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배의 거대함과 직면했을 때 나라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도망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망칠 길이 없어서 오히려 더 힘을 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많은 화물들이 선적되어 있다. 화물은 누군가의 기대이자,언제나, 당연히 두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