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꽃밭으로 살기 프로젝트]1. 진단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영화 <그랜토리노>를 봤다.
묵직한 영화였고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영화가 끝날 즈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월트의 극 중 친구 타오가 월트로부터 받은 유품
그랜토리노를 몰고 해안가를 달리는 장면이 있다.
달리는 그랜토리노 뒤를 연속화면으로 따라가는 동안 흘러나오는 노래에 나의 눈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Gentle now a tender breeze blows
(부드러운 바람에)
whispers through a Gran Torino
(그랜 토리노는 속삭이네)
whistling another tired song
(지친 노래를 부르네)
engines hum and bitter dreams grow
(엔진 소리는 울리고 슬픈 꿈은 커져)
heart locked in a Gran Torino
(그랜 토리노에 마음 기대어)
It beats a lonely rhythm all night long
(외로운 리듬 밤새 울리네)
영화가 울리는 묵직함에 방 안의 온도는 2도쯤 더 낮아진 듯 했다.
영화가 주는 여운과 영화의 끝을 알리는 노래 가사의 공허가 뒤섞여 집안을 부유하는 가운데, 노래가 끝나고도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는 내가 적잖이 쓸쓸해 보이고 약간은 싫어져 또 노트북을 열었다.
이 맹목적인 쓰기의 행위가 나를 살리기도 짓누르기도 하지만 이런 순간의 이런 선택은 매번 나를 위로했고 믿고 선택하는 편리한 최후의 보루가 돼가고 있다.
영화는 듣던 대로 훌륭했고 영화에 대한 감상은 이걸로 끝이다.
애초에 내 마음 다스리고자 시작된 씀이니.
다만, 영화가 훌륭했음에도 원래 같으면 그 여운에 충분히 빠질 시간에 나의 공허함과 마주하게 된다는 현실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부재. 공허함. 외로움.
요즘의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들이겠다.
사실 이렇게 된 지가 꽤 되어 간다.
내가 뭔가를 행했다는 인상 깊은 사건이 없었음에도 시간 따라 흘러가는 별 일 없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별다른 자유의지가 없었느니 기억도 가물가물이다.
분명 달라졌는데 언제부터 변했는지 모르겠고, 잃어버렸는데 어디에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의 나의 휴일은 마치 윤동주 시인이 걷던 돌담길을 따라 걷고, 주머니를 헤집는 시간들이다.
나의 자아는 답을 찾지 못했다.
잃어버린 것을 이미 찾았으면서 짐짓 모른 척 하고 있나.
대신 이 길이 조금이라도 의미 있도록 길을 걷는 시간에 참 많이도 돌이켰다.
상실 전 나의 삶은 그래서 좋았는가?
반반이다. 좋기도 싫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한 지금과도 쌤쌤이다.
나의 삶은 지금 잃어버린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도 쉬지 않고 종목을 바꿔가며 나를 힘들게 했고 잠깐은 쉬게 했고 또 눈치 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이 인생은 죽을 때까지 답을 찾는 지난한 과정이고 그 과정의 시기별 미션을 컴플리트 하면서 피할 수 없으니 이왕이면 즐기며 살라고 하는 것이겠다.
내가 상실한 것에 즐기며 사는 법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옛 성현 같은 이 어른들의 말이 끄덕여지기도 끄덕여지지 않기도 한다.
익숙하게 함께 즐기던 이들의 부재, 뻔하게 해오던 것들이 낯설어진 일상의 어긋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기며 사는 게 지당하다.
그럼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가?
일단은 부재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난 지금 어쨌든 혼자다.
그랜토리노 영화를 보면서 아직 흰머리 세네 개에 기겁하는 삼자 초입 주제에 독거 노인에게 점철된 외로움이 먼저 와 닿는 중이다.
그러니 내가 혼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실에 더이상 자존심 상하지 않을 것이다.
불필요한 자기연민도 트래쉬다.
지금껏 외로움과는 익숙하게 지내지 않아왔던 탓에 내가 근래 들어 느끼는 외로움을 고독이라고 자주 포장했다.
그러나 그게 고독이었다면 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게 아니라 그랜 토리노가 주는 울림에 대한 감상평을 쓰고 있을 것이다.
부재 전의 나와는 농도가 다른 지금의 나다.
그렇담 지금 난 겨우 외롭단 말을 빙빙 돌려 장황한 산문으로 쓰고 있는 것인가.
열 길 물속도 모르지만 한 길 내 속은 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 정도?
그리하여 지금 나와 그간의 내가 달라짐의 확실함 정도. 그러니,
일단은 이렇게 글을 쓰든 나가서 뛰든 혼자서 오롯이 외로움과 맞장 떠 나의 고독을 되찾겠다.
흔히들 하는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면 그 곁에서 외로울 뿐이라는 말을 적극 공감하는 바이기에 그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라도 우선은 단정히 이런 지금의 내 어긋남에 익숙해지겠다.
잘 하면 친해질 수도?
어떤 수양이든 고된 것이고 이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기 미션 역시 고될 것이다. (극심할 수도...)
그래도 인간에겐 이럴 때 꺼내 쓰라고 있는 상투적 메시지가 있지 않은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