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환경 따위가 내게 주는 영향2

15,May,2020

by 느림주의자


이불을 턱 끝까지 덮고는 포근함을 느꼈다. 좋아하는 등을 켜놓고 은은한 조명 빛으로 물든 방에 멀뚱멀뚱. 딱, 딱 사 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자존감을 한껏 얻었던 그즈음으로, 언제나 푸르렀던 하늘을 했던 그즈음으로,

언제부터였을까 내 자존감이 낮았던 게. 기억을 되돌리고 되돌려보면 십오 년 전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사이 딱 자존감이 형성되던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큰 키에 조금씩 올라오는 여드름 그리고 포동포동 올라온 살. 2차 성징의 정점을 찍고 있던 나는 이쁘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지만 내 주위가 문제였다. 하나 있는 여동생은 마른 몸에 적당한 키, 여드름이 없었고 또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친가나 외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나와 다른 그녀를 보고 만날 때마다 이쁘다, 얼굴이 작다 등 나도 듣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놨고 나에게는 언제 살을 뺄 거냐 너네 정말 자매가 맞냐는 말만 늘어놨다. 아직 완벽한 성격이 형성되지 않았던 그때는 애매한 웃음을 내보이며 감정 없는 표정을 지어버리곤 했지만 어느새부턴가 거울이 보기 싫었고 사진이 찍기 싫었고 내가 싫어졌고 미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한다면 한다는 것을 처음 보여줬던 대입시험이 내 인생에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주변의 시선들도 모두 달라졌다. 특히 제일 크게 달라졌던 시선은 부모님의 시선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나를 자랑할 때면 뿌듯했고 좋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1, 2학년 때는 정말 정말 후회 없이 놀고 3, 4학년 때 공부를 하겠다고 부모님께 선전포고를 했다. 들어는 갔으니 네 마음대로 하라는 엄마 아빠의 말을 대답을 들었고 정말 신나게 놀아 점수는 엉망진창이었지만 대학교 신입생 시절은 이제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 전혀 후회는 없다.

대게 우리 학교 미대 학생들은 재수를 하지 않으면 1-2년 정도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녀오거나 교환학생 혹은 어학연수로 견문을 넓혔는데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난 모아둔 돈도 없었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그래 주실 일도 없고 그때는 그럴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차라리 학기를 전부 다 끝내버리고 돈을 모아 혼자 여행을 가는 건 인생에 한 번쯤은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오곤 했는데 이학년을 끝낸 어느 날, 근래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어느 날, 반 고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어느 날, 그의 그림을 한 번쯤 봐야겠다고 생각이 든 어느 날, 부모님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휴학 신청서를 제출하고 집에 갔다.


‘엄마, 나 휴학했어.’

라는 말에 휴학을 왜 하냐며 지금 우리 돈 벌 수 있을 때 얼른 졸업해야 한다는 말만 늘어놓은 부모님이었지만 이미 미국에 한 번쯤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나를 누구도 말릴 순 없었다. 세계 지리에 별 지식도 관심도 없고 태어나서 해본 해외여행이라곤 20살 보라카이 여행이 전부였던 나는 반 고흐의 그림이 있는 뉴욕이 고모가 계신 엘에이에서 비행기로 6시간이 걸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몇 개월을 열심히 열심히 돈을 모았다. 유방암에 걸린 고모가 한국에 오시기 전까지, 다행히 고모는 수술을 잘하고 미국에 돌아가셨고, 우리 수연이 오면 고모가 미국 구경시켜준다고 꼭 오라고 하셨지만 엄마와 나는 고모가 내가 가면 적지 않게 신경 쓰실 꺼라 고모의 회복에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풀었던 풍선 같은 나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이대로는 아쉽지 않아?’
정말 정말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2년 만에 부모님 몰래 휴학하는데 들키는 시간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뉴욕이 동부 인지도 모르고 계획했던 미국 여행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바람을 타고 흘러가 버렸고, 8개월간 진짜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책상 위 미국 여행기가 담겨있는 책을 보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엄마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여행하려고 휴학했는데 정말 이대로 복학해야 하는 거냐는 나의 말에 엄마에게서는 이대로 복학하면 아쉽지 않냐는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저 그 말을 건넨 엄마에게 고마웠을 뿐. 엄마가 나의 휴학을 이렇게나 응원했던가? 아무쪼록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달콤 대답이었다.


그렇게 나는 계획에도 없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미국 여행이 취소된 지 세 달 만에 떠났다. 떠나온 이 길들에서 평생 동안 없던 자존감이 생길지도 모르고,결국 내 풍선은 터지지 않았고 새로운 꿈으로 부풀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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