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서사는 대개 ‘만남부터 끝’까지를 다룬다.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귀었고, 그래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서사의 4단계처럼, 연애 또한 기(만남)-승(사귐)-전(만나고 다툼)-결(헤어짐)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연애 서사에서는 이별 이후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이별의 후폭풍까지 지난 뒤, 이별 이후의 삶은 대개 세 가지 결과로 나뉜다. “그런 쓰레기 새X랑 헤어져서 다행이야.”, “아직도 잊지 못했어.”, “감정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젠 괜찮아.”
그런데 이 감정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여행 이후에 느끼는 감정과도 닮았다는 사실. 한바탕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뒤에 우리의 반응 또한 세 가지로 나뉜다. “최악이었어.”, “기회만 있으면 다시 가고 싶어.”, “좋았지만, 그 기억으로 잘 살아가야지.” 이별 이후의 반응과 상당히 유사하다.
따라서 연애도 일종의 여행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별을 연애의 과정에 넣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금액을 정산하고, 느낀 점을 정리하고,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며 다시금 그때를 기억하듯이. 다시 말해, 이별 직후는 물론, 이별 이후도 연애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행복했던 여행과 좋은 여행은 조금 다르다. 그저 마냥 즐거웠던 여행은 당시에는 즐겁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휘발된다. 딱히 그 여행으로 말미암아 바뀐 것도 없다. 반면 좋은 여행은, 당시에는 힘들고 괴로웠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오랜 추억이 된다. 여행으로 말미암아 내 생각과 사고, 나아가 가치관이 바뀐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연애도 있지만, 좋은 연애도 있다. 그리고 좋은 연애는 연애의 과정보다도 연애 이후, 즉 헤어진 다음이 더 중요하다. 이별은 괴로웠을지 몰라도 그 사람과의 연애가 내 생각과 사고,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꾸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연애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별 이후의 삶까지도 연애에 포함한다면, 그 연애의 끝은 언제일까. 성급하게 ‘다음 연애가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정의 내리면 안 된다. 전에 했던 연애로 말미암아 나의 가치관이 변화했다면, 다음 연애 또한 이전 연애의 연장선상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연애의 끝은, 그 연애의 결과가 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변화된 삶이 더 이상 변화된 삶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찾아온다. 다시 말해, 변화된 삶이 완전히 나 자신이 될 때 그 연애는 끝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전 연인이 돈까스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길래 나도 몇 번 따라 해 보았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돈까스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것이 진심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 때, 더 이상 그게 (전) 연인이 좋아했던 취향이 아니라 내 취향이 될 때, 그 연인과의 연애는 종결된다.
이별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잊힌다. 그런데 왜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걸까. 부분적으로는 헤어진 연인에 대해 망각해서겠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었던 그 사람의 취향과 습관과 행동과 가치관이 나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일 터. 즉, 내 안에 이질적이었던 ‘당신’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헤어진 연인과의 연애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결국 연인과 헤어지는 이유도, 서로 결코 닮아갈 수 없는 지점, 평행선과 같은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닮을 수 없는 지점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헤어졌다면,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을 닮을 수 없는가,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데 나를 닮을 수 없는가. 나의 욕심 때문인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가, 가치관 때문인가, 쓸데없는 자존심 또는 고집 때문인가.
이별을 갈무리하는 과정은 불필요한 자기연민이나 자기혐오를 극복하게 해 주고, 정말로 나에게 중요한 가치관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당신과 닮았지만 이제는 나인 것’을 포섭하고 ‘원래부터 나인 것’을 찾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예전의 나에게는 새롭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은 ‘내’가 탄생할 때, 종전의 연애는 완전한 끝을 맺는다.
헤어졌다고 연애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이별에서 어떠한 갈무리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면, 직전의 연애는 끊임없이 다음 연애에 (악)영향을 미친다. 헤어짐을 극복하는 방법은 헤어짐을 직시하는 것이다. 자신을 불로 태워 타버린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변화한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연애를 종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