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를 오랜 시간 깊이 사랑하기 전까지는 이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참 오래, 많이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연애하기 전까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연인에게도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나를 서운하게 해도, 나를 피곤하게 해도, 내가 하기 싫은 행동을 해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온전히 헌신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연인에게 몸 바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좋아하니까, 그게 되더라. 800일이 넘는 시간을 만나면서, 유일하게 집에 데려다주지 못한 순간은 몸이 너무 아프고 피곤했을 때, 단 두 번뿐이었다.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항상 짧게라도 통화를 했고, 매달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해 주었다. 원래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상담을 잘해준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사람이 상처받고 힘들어 한 날이면 더 세심하게 위로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돈을 더 벌려고 노력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좋아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해 주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
후회 없이 사랑하고 헌신했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는 게 곱씹을수록 신기하다. 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결핍이 많고, 생존 본능이 강한 사람인데. 정언명령에 따라 억지로 해야 하는 몇몇 선행을 제외하면, 내게서 볼 수 있는 자발적으로 선한 면모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거겠지.
그런데도 지난 연애는 결국 끝을 맞이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함을 대면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나의 생각이, 나의 가치관이, 나의 삶이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해. 하지만 그것이 나인 걸 어떡해. 그것마저 나인 것을, 그것 없이는 나도 없다는 걸 어떻게 하겠니. 단순히 사랑한다고, 헌신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고, 문제는 너 자신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사랑을 한다는 건, 정확히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봉사, 희생, 헌신. 이런 게 가미된다고 사랑이 완성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문을 조금은 닫아두게 된다. 적당히 계산하고, 적당히 희생하고, 적당히 사랑한다. 어쩌면 그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너무 진심이라면, 결국 다치는 건 서로이니까.
과연 현명한 방법이지만, 좋은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이란 상처와 고통의 연속이건대, 그것 없이 '적당한 사랑'만 즐긴다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또한 가능한 일인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차가움과 달콤함을 같이 느껴야 하듯이, 상처를 동반하지 않은 진공포장된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차가움을 뺀 아이스크림은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과자나 사탕일 텐데. 그렇다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상처를 겪었고, 그 기억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또한 적당한 타협일지 모르지만, 나는 “사랑하라,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이 그 방법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상처를 아예 모르는 사랑은 천진난만한 사랑이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랑은 사랑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사이로 걸어가야 한다.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난 사랑의 아픈 기억은 존재하지만, 그 기억이 나를 뒤흔들진 못해. 지난 사랑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하지만, 그것은 다음 사람을 위한 것. 설령 이별의 아픈 기억이 여러 개라도,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 사랑한다면, 다음 사랑은 좀 더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이 될 것이다.
결국엔 이 또한 용기의 문제이다. 용감하다는 말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문제에 도전할 때 쓰는 말이다. 상처를 모르는 사람이나 상처에 매몰된 사람은 사랑에서 생겨나는 상처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또다시 사랑에 상처받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에 도약한다. 지난 연애와 아주 똑같진 않더라도, 여전히 희생하고, 헌신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그러니 이런 행동은 용기 있다고 할 수밖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용기 있는 행동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칭송을 받았다. 모든 새로운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 사랑하는 용기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