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montage)
연애가 끝났을 때 시간과 공간 곳곳에 널려 있는 당신의 흔적들을 마주하기란 참으로 고통스럽다. 사진들을 지우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내가 지우고 있는 건 당신의 사진뿐만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라고. 휑하니 빈 사진첩, 한때 당신에 대한 물건으로 꽉 차 있던 보관함의 빈 공간. 인생을 얼마간 지운 기분이다.
그래도 사진은 영영 지워버리거나 불태울 수 있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도 모두 버리면 그만이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 건, 당신으로부터 옮겨온 나의 새로운 습관, 생각, 감정들이다. “추울 때면 꼭 목도리를 챙겨 나가야 해. 목도리만 둘러도 제법 따뜻해지거든.” 추운 겨울이면 반드시 목도리를 두르는 게 습관이 된 나는, 추운 겨울이 되면 반사적으로 당신을 떠올린다. 지울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언젠가는 이 또한 잊힐 기억이란 것을 알지만, 그 시간이 언제쯤 도래하는지는 알 수 없으니…….
왜 사랑에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나누려는 걸까. 사랑은 분명 혼자서는 누릴 수 없는 깊은 행복감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자, 때로는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기도 하는데. 생물학적 번식욕 때문일까, 유아기 성 충동이 재현하는 일인 걸까, 아니면 흔히 말하는 대로 그저 “외로워서”일까. 이런저런 사랑의 가설들을 찾아보지만, 마음에 딱 드는 정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것이겠지. 언제나 다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나로 정립할 수 없는 사랑의 행복과 고통과 기쁨과 슬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니 사랑에 대해서는 차라리 ‘몽타주’로 이해하는 게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따로 촬영한 영상을 이어 붙여 자연스럽고도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듯이, 사랑에 대한 각각의 이해를 모두 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마치 ‘중력’처럼 나도 모르게 끌리는 감정이기도 하고, ‘소설의 첫 문장’과 같이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언젠가 평범해질 위대한 ‘첫 만남’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 사람에게 ‘영원한 목소리’를 남기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이다.
마치 ‘운명’처럼 그 사람을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람이 선사하는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너’가 사라질 때, 당신의 흔적이 ‘흉터’가 될 때, 그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상처받은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장면이, 한 편의 영화처럼, 하나의 사랑으로 존재한다. 세상에 n명의 사람이 있다면, 사랑은 2ⁿ만큼 존재할 것이다. 사랑이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까닭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을 바라볼 때, 무서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듯이, 무한한 형태로 존재하는 사랑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사람과의 연애는, 오직 나와 그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 아무리 비슷한 조건과 상황이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다.
모든 사랑의 경험은 마치 몽타주 기법처럼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 사람과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사랑을 재발명’한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당신도 있는 거라고 말하는 사랑. 지금 곁에 있든 없든 “당신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 그렇기에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이 말은, 구태여 이런저런 해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보편적인 사랑을 재발명한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랑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사랑은 개념에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주체, 대상, 나, 당신이라는 구조를 갖지 않는다.
- 엠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