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단말쓴말] 장점이 적어 고민인 이를 위한 단말
'이럴 줄 알았으면 학부 때 디자인 자격증이라도 따 놓을 걸.'
비록 학보사 편집장까지 역임한 바 있지만, 본격적인 '업'의 세계는 학생 때의 그것과 달랐다. 학생 때는 주어진 일만 잘 수행해도 100점이었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오오 능력자 오오'하는 소리를 듣기도 쉬웠으니까.
하지만 실제 업무의 세계는 달랐다.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이 글쓰기 하나였다면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 2, 3개(글쓰기, 그림 그리기, 디자인 툴 다루기, 영상 촬영하기…)씩은 갖고 있는 듯했다. 설령 같은 글쓰기 능력이라도, 나보다 더 훌륭해 보였고 말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갖고 있는 스킬(skill)도 부족한데 스탯(stats)도 부족했달까. 분명 학생 때 생각 없이 논 건 아니었는데, 왜 나는 좀 더 다양한 능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 후회하곤 했다.
사보 편집자에게 중요한 역량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맞다, 사실은 잡부라는 뜻이다). 아이템을 엮어 하나의 기획으로 만드는 기획 능력, 적절한 외부 작가를 선정하고 인터뷰 대상을 컨택하는 섭외력, 예산과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는 안배력, 훌륭한 사진과 디자인을 감별하는 심미력, 좋은 인쇄소를 찾아 협의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400km 왕복 운전을 하고도 야근을 할 수 있는 강한 체력 등. 가진 거라곤 글줄 좀 쓰고 편집하는 능력뿐인 나에겐, 이런 종합적인 능력을 모두 소화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그날도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깨달은 날이었다. 상급 관리자한테 깨지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팀장님이 따로 불렀다. 분위기상 내리갈굼은 아닌 듯했는데, 묻는 말이 "너는 뭘 잘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난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잘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옆에 있던 선배 L은 "왜, 글 잘 쓰잖아?"라고 나름 변호해주었지만, 나로서는 솔직한 진심이었다. 가진 거라곤 글쓰기 능력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방금 부족하다고 혼나고 자리에 돌아온 참이었으니. 그때, 팀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단점이 없는 사람이 꼭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같은 이유로 단점을 꼭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래서 사람을 볼 때도 웬만하면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때로는 장점 하나가 모든 단점을 극복하기도 하거든."
그러니 단점이 적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단,
장점이 큰 사람이 되렴.
벌써 3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말과 상황 그리고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자존감이 지구 내핵까지 떨어져 있던 내게 이 말은 큰 위로가 되었고, '일을 잘하는 사람의 기준'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처럼 열등감과 더불어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노력한다. 일단 글을 잘 썼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직접 디자인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고, 혹시 필요할 수도 있으니 영상 편집도 좀 배워두고 싶고, 다른 능력자들처럼 제2외국어도 하나쯤 구사할 줄 알았으면… 하지만 속담에도 있지 않는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고.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불세출의 천재도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고, 평범한 존재인 우리는 한 가지 능력만 잘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옆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나의 단점만 크게 보인다. '왜 저 사람은 글도 잘 쓰는데 사진까지 잘 찍지?', '와, 개발자인데 일러스트도 그릴 줄 알다니, 엄청난 능력자네.', '그런데 왜 나는 한 가지도 못 하는 걸까?'
하지만 팀장님의 말처럼, 그건 그냥 그 사람의 '큰 장점'일뿐이다. 어떤 사람은 디자인도 잘하고 영상도 잘 뽑아내는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최악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글 쓰는 개발자인데 디자인 센스가 심하게 떨어질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볼 때는 '큰 하나의(a) 장점'에 주목하여 '작은 단점들(s)'은 무시하는데, 왜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돌아보지 않는가. 내가 볼 땐 부족해도, 남들이 볼 땐 뛰어난 장점 한둘쯤은 우리 모두 갖고 있다. 조금씩 역량의 차이는 날지언정, 각자의 개성을 갖고서 말이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을 준비하던 시기에 팀장님을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와인 바에서 회포를 풀며 지난 이야기를 하다가 직장 이야기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때 배웠던 여러 스킬들이 있어서 자기소개서에 채울 내용은 많네요. 기획, 예산, 편집, 디자인…. 뭘 쓰는 게 좋을지 고민인 걸요." 그러자 팀장님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너 같으면 무력 100에 지력, 정치력, 매력 30인 여포를 쓸래? 아니면 모든 스탯이 50인 엄백호를 쓸래? 그냥 잘하는 거 하나만 써.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건 애매한 여러 가지 재능이 아니라 믿을 만한 단 하나의 재능이야."
단점이 적은 사람보다 장점이 큰 사람이 돼라는 말의 좀 더 매운맛 버전이 아닌가 싶다. 그 조언을 십분 받아들인 결과, 나는 자기소개서에 오직 한 가지 재능을 내세우는 데 몰두했고 두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두 번째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가 가진 능력이라곤 (그다지 만족스럽진 않은) 글쓰기 능력 하나뿐이지만, 이제는 어딜 가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나만의 '큰' 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