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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는 게 뭐 어렵다고요."

[조직의 단말쓴말] 도움 요청을 꺼려하는 이를 위한 단말

by 이준유

'도움은, 주긴 주더라도 받지는 않겠다.'


모임의 장을 맡아 일을 하게 되면 늘 되새기는 말이었다. 자존심이 셌던 나는 일을 할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도움 주는 것까지 인색하지는 않았으나, 도움 받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했다. 선뜻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고,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애써 괜찮은 척 거절했다.


웬만해선 도움 받지 않으려던 습관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아마 빚지고 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에서부터 비롯된 거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특히나 빚 지는 게 너무 싫었다. 당장의 필요를 위해 언젠가 갚아야 하는 '채무관계'를 만드는 게 극도로 꺼려했던 것이다. 내게 도움이란 그와 비슷했다. 도움을 받았다면 언젠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채무관계가 생기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도움을 주는 거야 갚는 사람이 갚든 말든 상관 없었지만.


그러나 그게 가능한 건 딱 학생 때까지였다. 학생 때의 일이란, 돈과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슈퍼맨이나 능력자 한 사람에 의해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 정 못하겠으면 도망쳐도 된다. 휴학을 해버리거나 최후의 경우 자퇴를 하는 방법도 있다. 굳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 필요도 없다. '학생이니까 그럴 수 있지'하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서, 어지간한 사고가 아니고서는 어느 정도 실수로 용납된다. 다시 말해, 학교를 졸업한 뒤 실제 업무 현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개인 플레이가 허용되는 시기는 대학교가 마지막이다.


업무를 할 때는 좋든 싫든 필히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업무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획 특집 기사를 쓰는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기사'만' 쓰면 되는 게 아니다. 우선 취재대상을 섭외하기 위해서는 섭외해줄 만한 사람과 연락해야 하고, 일정이 확정되면 사진 기자에게 전해야 한다. 돌아온 뒤에 예산 처리 내역을 예산팀에 요청해야 하고, 작성한 원고를 디자인에 얹히기 위해서는 디자인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사람의 도움이 약간씩이나마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잡지 제작 같은 '종합 업무'가 괴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거의 매일 도움을 요청하는 게 일이었으니까. 언젠가,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나의 메일을 받은 동기 녀석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뭘 그렇게 비굴하게까지 부탁해? 좀 더 당당하게 이야기해도 되잖아." 그러나 내 딴엔 '당신의 도움을 갚기란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는 말을 최대한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정말 어렵사리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다. 급하게 취재 대상을 찾은 거라 거의 하루 만에 통보를 하고 취재를 간 것이었다. 만나자마자 나는 감사함을 표하며 바쁜 와중에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취재 대상자의 말이, 뜻밖에 나의 마음을 건드렸다.

도와주는 게 뭐 어렵다고요.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도움을 주긴 준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도움 받긴 싫어하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물론 도움 받기만을 좋아하고 도와주는 건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도움을 청한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움 주기를 별로 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같은 조직이라면, 비록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경우는 드물어도, 도움을 요청했을 때 대부분 흔쾌히 'YES!'를 외쳤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내가 그 일에 어느 정도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요청 받은 일을 하려고 보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다반사다. 말 그대로 '뭐 어렵지 않은 일'인 것이다. 따라서 도와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로 큰 부담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나 어렵지, 그 사람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이 일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 마음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태도 역시 그다지 좋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오히려 지극히 오만한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라면서 신세 진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애초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이었다.


또, 도움은 이어달리기 같아서, 꼭 내가 받은 도움을 그 사람 본인에게 갚아줄 필요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도움 받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갚아준 적은 별로 없지만, 대신 돌려 받지 못할 도움을 준 적이 몇 번 있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갚지 못할 그리고 받지 못할' 도움을 서로 베풀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알게 모르게 대부분의 사람이 공유하는 생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다"는 말을 들은 직후, 나는 약간의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 저 사람에게 갚지는 못해도 다른 사람에게 갚으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고 살았다.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대개는 흔쾌히(혹은 마지못해) 수락해주었다. 나 역시 도움을 요청 받으면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24권의 잡지를 만들며 단 한 번도 마감을 놓친 적이 없었던 이유, 그것은 오로지 나를 도와준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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