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은, 어떻게든 풀리게 되어 있어."

[조직의 단말쓴말] 일을 너무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단말

by 이준유

처음으로 보직을 옮겼다. 직장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이었다. 그리고 그 보직은 앞선 글에서 썼던, 사보 만드는 일이었다. 아직 직장에 제대로 적응도 못한 신입이(심지어 첫 사회생활이었는데!), 모든 소식을 샅샅이 알고 있어야 하는 사보 편집 업무를 맡다니? 나름 내부 사정이 있긴 했지만, 이유야 어쨌든 업무를 하는 주체인 나로서는 무척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첫 걸음이 가장 힘든 법이다. 처음으로 사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나는 1장짜리 요청문서를 만드는 데 무려 2시간이 걸렸다. 일시, 장소, 목적, 요구사항. 겨우 몇 줄을 적는데 2시간이 걸렸고, 결재를 올리기까지 또 1시간이 올렸다.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조차 숙지가 안 된 상태였기에,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담당자가 된 날, 내가 한 일이라곤 1장짜리 문서 2개를 결재 맡는 것뿐이었다. 매일 취재기사만 2~3개씩은 써야 겨우 마감에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울상 죽을상이었나 보다(실제로 집에서 자기 전 울기도 했고). 보다 못한 선배 K는 회의석상에서 이렇게 다그쳤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말해. 뭘 도와주어야 할 지 알아야 도와줄 거 아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을 요청할 부분이 없었다. 외부 기고는 어차피 기고자들이 쓰는 거고, 기획특집은 전부 내가 기획한 건데 어떻게 선배를 출장 보내겠는가. ‘이런 기획의도로 한 거니까 이렇게 써주시고요, 사진은 이렇게 찍어와 주세요.’ 이런 말을, 6개월짜리 신입이 할 수 있겠는가? 설령 선배님들이 그렇게 써온다한들, 만약 내 기획의도와 다르면 어떻게 하려고. 결국 편집자이자 담당자인 나로서는 누구에게도 손 내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그날따라 내 얼굴색이 흙빛이었는지, 선배 L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잠깐 드라이브나 할까?" 나 역시 차가 있었지만, 내 차는 그대로 둔 채 선배의 차를 얻어타고 일터에서 약 3km 떨어진 저수지에 갔다. 검게 물든 저수지, 말없이 낚시하는 강태공들을 뒤로 한 채 저수지 끝까지 계속, 계속 들어갔다. 타박타박, 파삭파삭…. 자갈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곳에 잠깐 내린 뒤 저수지를 바라보며 선배는 이런 말을 꺼냈다.


일은 결국 일로 풀어야 돼.
그리고 일은 어떻게든 풀리게 되어 있어.


선배 역시 정말 힘든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그래서 친구들을 찾아 하소연도 하고 욕도 하고 일부러 최대한 일을 미뤄보기도 했다고. 하지만 깨달았단다. 결국 일은 일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로 풀지 않는 한, 그 일은 끝까지 나를 따라온다고.


그리고 선배는 이어서 자신도 어느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일은 어떻게든 된다'고.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일은 결국 어떻게든 해내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면, 결국 일을 해낼 것이라고.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우리는 돌아왔다. 그날밤 나는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 일을 끝내기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이 미친듯이 몰려들어 일에 치여 살 때가 있다. 당장 내가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에.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비록 그 모양새가 내가 원하는 건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일은 하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말이다. 일은, 정말로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자. 일은 일로 풀어야 하고, 그 일은 결국 풀리게 되어 있다.


모두의 우려와 달리 나는 배포일에 맞춰 내가 만든 첫 사보를 비치대에 올려둘 수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내는 우편 배송도 어렵지 않게 끝냈다. 그렇게 한 권을 끝내자, 두 권째부터는 한결 편했다. 세 권째부터는 조금 더 쉬워졌고, 네 권째부터는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사라졌다. 자신감이 붙었다. 팀장님은 "본래 임시직으로 잠깐 맡기려고 했는데, 쭉 앉히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3개월만 하면 돼. 실질적으론 2~3권만 만드는 거야.” 그 말을 믿었던 내가 바보지, 나는 ‘도저히 못 할 것 같았던’ 자리에서 2년 동안 24권의 잡지를 만들고 나왔다. 심지어 전면 리뉴얼 사업과 약 1억 원의 예산을 들여 홈페이지 제작 사업까지 끝마치고서 말이다. 그 무렵 공문서 하나 만드는 데 2시간이 걸렸던 시절은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정말로, 일은 어떻게든 풀린다.

keyword
이전 03화"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