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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통보지, 보고야?"

[조직의 단말쓴말] 보고할 때마다 혼나는 이를 위한 쓴말

by 이준유

조직의 직급체계는 부차과대(부장-차장-과장-대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딱 두 가지로 나누라고 한다면 '관리자/실무자(담당자)'로 나눌 수 있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로서, 실무자가 일을 해서 관리자의 결재를 받는 형태다. 관리자는 일을 시키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하고, 실무자는 일을 직접 하는 대신 책임을 지지 않는다.


조직에서 소통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대개 관리자/실무자 사이의 괴리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구조만 봐도 그렇지만, 일을 할 때 쉽게 괴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자기가 직접 일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며 책임을 져야 해서 부담스럽다. 반면 실무자는 관리자의 알쏭달쏭한 요구에 진이 빠질 때가 많으며 웬만해선 지적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없으니 계속 의욕 있게 일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대개는 관리자의 직급이나 짬이 더 높으므로 실무자는 입 다물고 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관리자의 숫자는 줄어들기에 그들의 책임감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덧붙여, 외로움도.


어쨌건 나 역시 실무자로서 관리자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말이다. 일에 대한 피드백이 내 인격에 대한 지적이라고 생각했고(물론 때로는 정말 그런 적도 있었지만), 일은 내가 다 하는데 관리자는 편하게 일하면서 생색만 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이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일이 정말로 급했던 탓일까. 어느 날은 취재와 관련해서 빠르게 일정을 정해야 하는 것을 갖고 관리자에게 막 총알처럼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지금 일을 망치게 생겼는데 빨리빨리 결정해줘야지!' 아마도 이런 급박한 마음으로 전달한 것이리라. 바로 그때, 관리자였던 과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통보지, 보고야?


아뿔싸. 순간 깨달았다. 관리자에게는 관리자의 일이 있다는 것을. 그때 통보와 보고의 차이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관리자에게 판단과 결정을 맡기는 것은 보고고, 그와 반대로 빼앗는 것은 통보다. 당연히 실무자는 '보고'해야지, '통보'해서는 안 된다. 이토록 당연하고 기초적인 이치를 나는 잠시 잊었던 것이다.


관리자의 일이라고 한다면 역시 '판단'이다. 오랜 시간 실무를 경험하며 얻은, 말이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통찰력'. 책임감과 더불어 판단의 대가로 관리자는 실무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아가는 것인데, 관리자로 하여금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관리자의 일을 빼앗는 셈이 된다.


또한, 판단과 결정은 관리자의 책임과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관리자의 결정은 곧 '이 방법, 이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를 뜻하므로, 관리자는 매순간 무거운 심정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무자가 바쁘다고, 이 방법이 맞는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중간) 관리자급도 아닌, 일개 실무자가 그런다면? 관리자로서는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조직의 '피라미드 구조'에서는 관리자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구린 판단을 하는 관리자도 많은 거,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실무자인 나의 관리자인 이상, 그의 입맛에 맞는 보고를 준비해야 한다. 아니, 최소한 통보는 지양해야 한다. 그게 실무자와 관리자 사이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최종 결정권을 넘기는 것.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히 고집이 세거나 주위에서 인정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조직은 일을 하는 곳이지, 동아리나 자선단체가 아니니까.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최선인 구조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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