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단말쓴말] 과도하게 '스마트함'에 집착하는 이를 위한 쓴말
'스마트폰'이 생긴 이래 '스마트함'이라는 단어 또한 스테디셀러로서 유행하는 것 같다. 신기한 IT 기기를 갖고 있거나 클라우드 서비스, AR/VR 등 진보한 문물(?)을 잘 다루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저 사람 참 스마트하다'라고 표현한다. 나 또한 그런 스마트함에 매료된 사람 중 하나였다. 메모도 가능하면 스마트폰 메모장을 활용하고, 일정도 스마트폰에 적고, 심심할 때면 신기한 IT기기가 없나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에버노트와 구글 드라이브를 이용하며 모바일과 PC를 넘나들 때는 '나, 정말 스마트하잖아?' 하며 스스로에게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첫 직장은 보안이 중요한 곳이라 대부분의 스마트 기기는 제한되었다.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태블릿, 스마트폰 등 모든 전자기기에는 보안 필증 스티커를 붙여야 했고, 직장 내부에서는 카메라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인트라넷 서버 망을 이용했기 때문에 카카오톡 등 기본적인 메신저 또한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고, 당연히 클라우드 서비스는 사용할 수 없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온갖 스마트 기기를 추종하고 있던 나는 상당한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회의 때마다 필기도구와 수첩을 챙겨가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장에서 제공하는 수첩의 디자인도 상당히 별로였고 말이다.
'스마트'한 분위기를 내보이고 싶었던 까닭일까, 그래서 간단한 메모나 일정 정도는 일부러 스마트폰을 꺼내 기록하곤 하였다. 어차피 수첩에도 적어놓은 사항이고, 결국 확인은 수첩으로 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과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와중이었다. 팀장님 또한 IT기기나 신기술에 관심이 지대하셨던 분이라, 40대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첫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 벌써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하시는 분이었다. "이곳은 무슨, 태블릿도 잘 허용해주지 않는 곳이라 말이지."라며 불평하시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상당히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용하는 '사람'은 비슷하기 마련이거든.
얼리어답터였던 팀장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신기했지만, 전에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라 한 번 더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이 쓸 수 있는 손가락은 10개밖에 없다, 아무리 똑똑한 기계가 등장하더라도 인간의 평균적인 지능은 크게 상승하기 어렵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지 인간 자체를 발전시키긴 어렵다. 즉, 기술이 발전한다고 인류가 무조건 진보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스마트함'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나는 과거 스마트 기기들에게 배신당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작업을 하려고 노트북을 켰는데 배터리가 하나도 없어 당황했던 경험, 오류 때문에 스마트폰에 저장했던 메모들이 모두 날아갔던 기억, 통신 오류 때문에 클라우드에 저장해둔 파일들을 불러올 수 없었던 기억 등. 최신 스마트폰, 첨단기술이 적용된 전자기기, 신기한 애플리케이션 등을 이용하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 스마트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일정을 스마트하게 정리하고 저장해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것을 실행하는 '인간'인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면, 그런 스마트함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UX와 HCI의 교과서라 불리는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 심리학』에서도 기술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놀랍도록 똑똑한 기술은 인간의 약점과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전자기기가 스마트하다고 인간까지 스마트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스마트해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업무 스케줄표만 작성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부분에서는 수첩, 메모지, 노트, 도서 같은 아날로그 아이템이 최신 전자기기보다 인간의 약점과 한계를 잘 보완해준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있는 메모지는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켜기-잠금해제-메모 애플리케이션 실행-검색-확인'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충전과 같은 번거로운 행위를 빼고도 말이다. 하지만 수첩에 적힌 메모는 '펼치기-찾기-확인'이라는 단번의 행위로 끝낼 수 있다. 즉, 팀장님의 말씀처럼,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나는 일부러 일정과 회의록을 적는 것은 수첩에만 적기로 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을 쓸 때는 언제 어디서나 꺼내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유용하지만, 빠르게 일정을 확인하고 업무 회의 내용을 적는 데에는 충전도 잠금해제도 애플리케이션 실행도 필요 없는 수첩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기술의 발전이 '무조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떤 부분에서는 디지털 기기보다 아날로그 기기가 더 유용하거나 쓸모 있을 때도 있다. 종종 무선 이어폰을 충전을 안 한 채 들고나갔다가 그저 '짐'만 되어버린 적이 있다. 유선 이어폰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말이다. 과거의 기술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거나 구시대의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팀장님의 말씀처럼, 기술의 발전을 분별해서 사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