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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너한테 배운 거야."

[조직의 단말쓴말] 업무 자존감이 낮은 이를 위한 단말

by 이준유

누구든 주니어 시절을 아름답게만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 귀에 익숙하지 않은 업무 용어들, 밀려드는 일들. 무엇보다 끔찍한 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팀원 이름과 업무 목록은 기본이고, 문서화되지 않거나 언어적인 표현으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업무에 임하는 태도라든지, 언어라든지, 습관이라든지. 차라리 대놓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대개 이런 부분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지라 눈치가 좀 떨어지는 사람은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주니어 시절에는 높은 자존감을 갖고 시작한 사람도 서서히 떨어지기 마련이다(슬프게도, 주니어 시절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의기양양하게 입사한 사람이라도 조직에서 몇 번 구르다 보면 '난 왜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못 하지?', '왜 이렇게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선배들은 모두 대단한 능력자 같아 보이고, 무언가 배울 점 투성이인데 왠지 나는 '모지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 첫 직장에서 그랬다. 나름 공부해보겠다고 밤늦게까지 매뉴얼과 용어집을 들여다 보고, 틈날 때마다 노트에 모르는 것을 적어두는데도 도무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매달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야 하는 업무 특징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너무 과문하게 느껴져 매일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버티다 말지 뭐'라는 마음과 '그래도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H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선배 H는 갖고 있는 재능이 많을 뿐더러 성격도 온화해 내가 따르는 사람이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앞으로 있을 큰 프로젝트에 대해 내가 조금 부정적인 언급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선배 H는 몹시도 긍정적인 태도로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잘 해결될 거야."와 같은 말을 했는데, 그 말에 나는 신기하다는 말투로 "우와, 선배님 되게 긍정적이시네요!"라고 말했다. 그때 선배 H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긍정적인 태도, 그거, 너한테 배운 거야.


그 말을 듣자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우리 부서의 관리자는 굉장히 엄격하면서도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이어서, 분위기가 굉장히 축 쳐져있는 느낌이었다. 아직 조직문화나 직장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회 '극초년생'인 나는 파티션 한쪽 귀퉁이에 사탕 박스를 하나 설치했고, 이렇게 써붙였다. "힘들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어요." 비록 사탕 박스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며칠 가지 않아 철거(?)됐지만, 선배들에게는 꽤나 긍정적인 사람으로 인식됐었나 보다. 꼭 사탕박스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엔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꽤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선배 H에게 그 말을 듣고 나니 무너진 자존감이 약간은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배우는 입장이고,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너에게 배운 거야'라고 말했으니까. 비록 주니어에 신입이지만, 누군가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냥 보람차게 느껴졌다.


신입들은 배우기에 바쁜 나머지, 또 일에 치여 자존감이 깎이는 나머지 자신에게 배울 점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기 쉽다. 특히 원래부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분명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관계는 없다. 교사마저도 학생을 통해 배우기도 하니까.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약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는 신입사원이라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해맑음 그 자체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잘 아는 메타인지가 또한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장점은 선배들이나 관리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축복 받은 능력 중 하나는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교정하는 능력이다. 만약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도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상호작용하여 발전하도록 진화하였고, 그 결과 어떤 동물도 이룬 적 없는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니 오늘도 업무에 치여 자존감이 푹 꺼진 신입사원들이여, 어깨를 펴시길. 당신의 오늘 모습은 어떤 선배에게는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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