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단말쓴말] Ctrl+C&V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쓴말
첫 직장은 공공기관이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공문서'를 작성할 일이 많았다. 아마 '전자문서'를 작성하는 직장인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이 공문서라는 것은 작성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글자체나 크기가 정해진 것은 물론이면 자간, 행간, 장평 및 어투와 용어도 구체적으로 정해져있다.
예를 들어 상급기관에서 하급기관으로 보내는 건 요청 또는 지시라고 하고,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으로 보내는 건 상신이라 하며, 비슷한 기관끼리 주고받는 건 전달이라고 한다. 또, '있음'이라 쓰는 것보단 '존재'라 쓰길 선호하고, '숫자가 부족하니 더 보내주시길 바랍니다.'를 '수급 부족으로 인한 공급 요청'과 같이 명사형으로 줄여 쓴다. 그런데 기관마다 혹은 상급자마다 선호하는 용어나 방식이 또 조금씩은 다르기 때문에 가끔 이상한 패티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해진다.
내가 상관으로 모셨던 분은 언제나 '문서는 기관의 얼굴, 보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를 강조했는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중요한 전자문서는 결재하기 전에 반드시 프린트로 뽑아서 보았다. 그 정도면 양호한 거 아니냐, 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 분이 언제나 자를 들고 문서를 봤다는 것이다. 자로 자간, 행간, 장평을 딱딱 재가며 살피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명조와 명조체를 구분하고 10포인트와 9포인트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중간관리자인 팀장님과 나는 언제나 공문서에 심각하게 공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잡지 취재라는 업무 특성 상 공문서 쓸 일이 무지하게 많았다. 섭외 관련 공문, 취재 요청 공문, 취재 협조 공문, 원고 청탁 공문, 원고 모집 공문, 모집 결과 발표 공문, 홍보 관련 공문, 검토 요청 공문, 예산 관련 공문, 공문, 공문…. 안 그래도 시간이 없어 죽겠는데 왜 그리 쓸 공문이 많은지.
언제나 마감이 촉박했던 나는 급기야 비슷한 공문은 '복사+붙여넣기'로 작성하곤 했다. 충주로 가는 취재 요청이든 원주로 가는 취재요청이든 어쨌든 '가는 것'은 매한가지지 않는가? 지역 이름 바꾸고, 담당자 이름 바꾸고, 취재 내용만 조금 손보면 될 일. 그렇게 생각해서 심심찮게 공문을 베껴 전자결재로 올리곤 했다.
그러나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꼼꼼히 본다고 봤건만, 원고 모집 공문에서 날짜를 잘못 기입한 것이다. 딱 한 달 전 날짜로 되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전 공문에서 그대로 베껴오면서 생긴 실수임이 분명했다. 해당 업무를 맡은 지 1년이 넘은 까닭이었을까, 그날따라 중간관리자와 관리자 모두 나의 실수를 잡아내지 못했고, 결국 해당 공문은 모든 직원에게 뿌려지게 되었다. 다행히 선배 한 분이 그 실수를 발견하여 금방 얘기해준 덕분에 바로 정정 문서를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일은 일단락 되는 듯했다.
당황하고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팀장님께 찾아가니, 팀장님은 급하게 (또) 공문서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바쁜 표정이었다. 그때 팀장님은, 눈은 공문서를 향한 채 이렇게 말했다. "바쁘지? 하지만 공문서처럼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때는, 웬만하면 복사해서 넣지 말고 다시 쓰는 게 좋아.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결국 복사한 걸 검토하다 보면 시간도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거든."
때로는 처음부터 직접 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아마 사무업을 하는 사람에게 Ctrl+C와 Ctrl+V는 가장 소중하고 유용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컴퓨터에서 '복붙' 기능이 없었다면, 아마 과학과 문명이 지금보다 20년은 더 늦게 발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복붙을 신봉하며, 모든 일을 복붙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복사 후 붙여넣기에는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다. 첫째, 근본적인 실력을 키워주지 못한다. 복붙은 위대한 문서도 내가 쓴 문서처럼 만들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는 동시에 '내가 그런 문서를 만들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언제나 같은 문서만 쓸 것도 아니고, 때로는 새로운 공문을 쓰기도 해야 할 텐데, 복붙만 해온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필히 곤란을 겪게 된다. 고이고 고여 손에 일이 익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처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웬만해선 직접 써봐야 한다.
둘째, 실수를 쉽게 알아채기 힘들다. 우리의 눈과 뇌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한 번 보거나 결정지은 사안에 대해서는 상당히 게으르게 판단하는 편이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퇴고할 때마다 오탈자가 발견되고, 그 원고를 편집자에게 주면 또다른 오탈자가 발견되는 까닭이다. 하물며 범인이야 어떨까. 복사해서 붙여넣은 뒤 다시 수정하고 재검토하는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나 오탈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오탈자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문서를 검토해야 하는데, 몇 번씩 다시 읽으며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차라리 새로 쓰는 게 훨씬 빠를 수도 있다. 특히 공문서처럼 중요하지만 길지 않은 문서라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복붙의 단점은 생각의 경로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서가 그렇듯이, 공문서 또한 글이기 때문에 생각의 경로가 녹아 있다. 가령 간단하게 정보전달 문서를 쓰더라도 '언제 어디서 하는가?', '누가 하는가?', '왜 하는가?', '누가 참여할 수 있고 누가 하면 안 되는가?' 등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복사-붙여넣기 후 중간에 내용을 수정하게 되면, 일련의 사고의 흐름이 깨지게 된다. 그 결과 날짜나 장소를 바꾸는 정도의 수정이 아니라면, 문서의 전반적인 흐름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
그때 이후 나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경우 (보면서 조금씩 베낄 지언정) 간단하게 '복붙'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확실히 실수도 줄어들었고, 문서 작성 능력도 전반적으로 올라갔다. 사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문서 작성에만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왜,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때로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오히려 시간도 아끼고 능률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아도, 정석은 '정석'이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