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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r 18. 2021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시인의 본명은 백기행이고요.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소월 역시 1902년 평안북도(구성)에서 태어났죠. 한반도의 북서단에 있는 평안북도는 가깝지만, 너무나 낯선 곳이지요. 마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속에 '무진'과 같이 안갯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장소인 것 같아요. 북에 갈 수 없는 우리는 섬나라에 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어느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어요.


시인 백석 /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어린 시절에는 통일 그리기, 통일 글짓기 등 학교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덕분에 통일이라는 단어가 꽤나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삶과 동떨어진 단어가 되어가는 듯해요. 최근에 백석의 시를 다시 읽고, 김연수 소설가가 백석(백기행)에 관해 써낸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2020, 문학동네)을 읽고 나서야 오랜만에 분단과 통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얼마 전부터 황석영의 소설 손님(2001, 창비)을 읽고 있는데, 그 책도 개인의 고통을 통해 한국 전쟁과 분단의 쓰라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더라고요. 문학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 속 타인의 경험을 통해 돌아봐지는 시간과 아픔들.


오늘은 백석의 시를 한 편 읽어보겠습니다.


흰 바람벽이 있어_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에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그리움에 관한 시 중에서 제일 쓸쓸하고 아름다운 시는 백석의 시라고 생각해왔어요. 시인이 앉아 있는 '좁다란 방'은 망망대해 바다와 같네요. 깊은 고독에서 끌어올린 마음의 결을 이렇게 절절한 시로 풀어놓은 시인에게 존경을 품게 됩니다. '외로운 생각'에 헤매던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가난한 늙은 어머니'의 고됨이 보이고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사는 평범한 풍경을 그려집니다. 시에 나오는 '앞대'라는 시어의 의미는 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북에서 남쪽에 있는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것이지요.


이제 흰 바람벽에는 '쓸쓸한' 화자의 얼굴이 보입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지만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시구가 이어집니다. 저는 이 부분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자신의 외로움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져서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면 나를 위로하는 법을 알아야 하잖아요. 하늘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이의 숙명은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일 테지만 넘치는 사랑과 슬픔이 있어 견뎌집니다.




해방 이후 북에 남은 백석은 1965년 「나루터」라는 동시를 끝으로 그가 세상을 달리 한 1996년까지 삼십여 년 동안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어요. 어떤 파고가 그 삶을 통과한 걸까요.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백석, 백기행의 삶의 단면이 김연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그려집니다. 소설에서 기행을 만나고 그의 시를 다시 읽었을 때 애틋해지는 마음을 이해하실까요. 김연수 소설가의 문장으로 백석을 만날 수 있어서 슬프고, 따뜻했어요. 시인을 입체적인 인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소설 속 기행의 말을 옮겨며, 당신께 권해봅니다.


시와 소설과 아침의 봄을.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 우선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었지. 제목은 사슴이면 좋겠고. 시골 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면 싶었고.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하지.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2020, 문학동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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