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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수 Oct 28. 2017

'색채가 없는 나', 죽음을 생각하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의 우울, 왜 여기 이입하게 될까

다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발췌한 문장들입니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 따위 날달걀 하나 들이켜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 본문 7쪽 중에서


이 책을 문득 다시 집어 책장을 넘기게 된 건, 소설의 도입부에서 묘사된 쓰쿠루의 심정과 행동이 우울증이 심하던 시절의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책에서 주인공이 연애를 하고 학교를 다니거나 자신만의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 우울에 관한 묘사에 공감되는 편이었습니다.


우선 '색채가 없는' 본인의 성격에 침울해하는 주인공의 성격에도 이입됐는데요. 극 중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색채가 들어가고 뚜렷한 특기가 있는 반면, 쓰쿠루 본인이 너무 평범하고 이름에도 색채가 없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낍니다.


제 경우에도 우울의 원인 중 일부가 집단에 녹아들지 못하면서 느끼는 소외감, 스스로 느끼는 초라함이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군, 회사 생활을 하면서 큰 문제없이 지내왔지만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됐다거나 일원이 된 느낌은 받지 못하고 늘 '아웃사이더'나 '은따' 같은 신세로 지냈다고 느낍니다. 때론 존재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미안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초라하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자꾸 더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위에서 인용한 글처럼 죽음이란 당연하고 합리적인 수순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끝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건 미련 때문이거나 비겁해서, 아니면 겁이 많아서 실행에 옮기기 두려워서 그런 걸까 싶기도 합니다.


"쓰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하여 거기에 걸맞은 구체적인 죽음의 수단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일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것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말하자면 일상의 연속으로서.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가까운 곳에서 그런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몰라. 쓰쿠루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여기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매혹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여기에서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 이 세계에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본문 7~8쪽 중에서


우울증이 심해진 상태로 보내는 나날은 그저 '기분이 불쾌한' 시간과는 조금 다릅니다. 자살을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로 여지를 남겨두는 건, 우울이 삶을 뒤흔들어 만드는 큰 파동 중 하나입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와중에 죽음은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지금 죽어버리면 다 편해질 텐데, 내가 미련하게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쓰쿠루가 되뇐 것처럼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뒤늦은 출렁임 같이 와 닿을 때도 있습니다. 겨우 우울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할 쯤에, 그게 착각이었다고 뒤통수를 때리는 차가운 손길처럼 문득. 자괴감이란 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어느샌가 다시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환영받지 못할 손님'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왜 자신이 그때 왜 그렇게까지 죽음의 턱 밑에 다가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 또한 쓰쿠루는 잘 모른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다고는 하나 죽음에 대한 동경이 왜 그렇게까지 강렬한 힘으로 반년 동안이나 자신을 휘감았을까? 휘감았다, 그렇다, 참으로 적확한 표현이다. 거대한 고래에게 먹히고도 그 배 속에서 살아남은 성서의 인물처럼 쓰쿠루는 죽음의 위 속에 빠져 그 어둡고 끈적끈적한 공동 안에서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는 그 시기를 몽유병자로서, 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자(死者)로서 살았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이를 닦고 손이 닿는 대로 옷을 걸치고 전차를 타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필기를 했다. 강풍을 만난 사람이 가로등에 매달리듯 그는 눈앞에 펼쳐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볼일이 없는 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혼자 사는 방으로 돌아오면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댄 채 죽음에 대해 또는 삶의 상실에 대해 끝도 없이 생각했다. (중략)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성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방에서 틀어박혀 지내다 피로해지면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걸었다. 또는 역으로 가 벤치에 앉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전차를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 본문 8~9쪽 중에서


일상의 '껍데기'를 유지하는 건 우울증이 심한 와중에도 가능합니다. 저도 매일 일어나서 출근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한 뒤에 운동하고 돌아오는 나날을 반복했습니다. '괜찮은 척'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이죠.


그러는 와중에 시간의 흐름 같은 건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버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내일이란 건 다시 시작되는 형벌의 하루일 뿐입니다.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뒤섞인 나날은 몇 개월이 지나도 끝이 없어 보이니까요.


해결책 같은 건 아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울증이 최근 나아진 건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한 덕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순 없는 거니까요. 정신과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개인적 비극을 보편적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라고들 하지요.


아마도 전 앞으로도 어딘가에 완전히 끼어들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겠죠. 자괴감과 우울을 유발하는 요인을 평생 마주치지 않고 피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도망치더라도 언젠가는 술래잡기가 끝나겠죠. 그 끝이 너무 비참하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을지 생각해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괜찮은 척 웃기' 가면을 쓰고 우울한 표정을 가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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