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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민 HEYMIN Sep 13. 2021

당신의 온도는 몇 도 인가요?

당근마켓편


"너 당근 해봤어?"


"당근? 야, 말도 마

우리 와이프 당근 중독인데

맨날 나보고 갔다 오래"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육아대디들의 당근 경험담이 흥미롭다. 채팅창에서 만나 거래를 성사하는 건 육아맘들인데 약속장소에 나가면 정작 마주치는 건 슬리퍼 끌고 나온 육아대디 둘이라니! 이제는 때가 지난 아이 장난감을 들고 나온 어느집 애기아빠와 그에게 다가와 ‘혹시…당근?’이라고 묻는 또다른 애기아빠의 투샷이 그려졌다. 참 귀여운 풍경이지 않은가. 투덜거림에서 묻어나는 애정이 느껴졌다.


요즘 당근은 더이상 먹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 되었다. 당근을 한다는 건 당근마켓에서 중고거래를 한다는 말.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식당에서도 지인들 사이에서도 당근!이라는 깜찍한 외침이 자꾸 들린다. 그건 누군가 당신이 올린 물건에 관심을 보였거나, 혹은 당신이 찜한 물건의 가격이 내려 갔다는 반가운 소식. 다른 어플이 보내는 알람은 다 끄거나 무시하는데 이상하게 당근마켓이 보내는 짧은 외침에는 즉각 반응하게 된다.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들뜬 마음으로 휴대폰을 얼른 집어든다.


이제는 간혹 예능에서 당근마켓이 언급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안테나뮤직은 유희열이 수장으로 있는 소속사인데 어느 예능에서 유재석이 농담삼아 그런 말을 던진 적이 있다.



"안테나뮤직이 당근마켓에 올라오면

제가 살거예요!"



한 프로그램의 MC가 녹화 도중 아무렇지 않게 꺼내도 되는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 그건 곧 서비스의 확실한 성공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당근마켓은 2015년 창업 이후로 쭉 입소문을 타다가 최근에 유명세까지 타면서 지나가는 사람 열을 붙잡고 물으면 다섯 이상은 안다고 고개를 끄덕일만큼 대중적인 서비스로 성장했다. 다섯이 적을지도 모른다. 체감상 거의 아홉은 아는 것 같으니까.


이제는 당근마켓이란 단어가 ‘중고마켓’을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는데 사실 풀어 쓰면 ‘당신 근처의 중고마켓’이라는 말이다. 어쩜 줄임말이 이렇게 귀여운지. ‘중고’와 ‘당근’이라는 서로 존재도 모를 거 같은 연결고리 없는 두 단어가 당근마켓이라는 한 공간에서 만나 주황주황한 따뜻하고 다정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요즘 부쩍 버스정류장 옥외광고에서 당근마켓 토끼 캐릭터를 자주 마주쳤는데 알고보니 그게 토끼가 아니라 귀여운 동네 강아지였다. 숨은 사실을 알고보니 더 귀여워보이는 건 왜일까. 토끼탈은 쓴 그 동글동글한 친구가 다정한 브랜드 이미지에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나는 과거 어느 스타트업의 창업멤버로 합류해 2년 정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일까. 당근마켓이 마주한 성공이 당시 내겐 너무 고팠던 일이기에 어딜가도 보이는 옥외광고와 예능의 그 한 장면이 더 달고 맛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스타트업 회사의 이름이 사람들 일상에 스며들어 당근을 하니마니 대화가 오고간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왜 자꾸 당근마켓 어플에 들어가 엄지로 쭉쭉 내려보고 있는지, 집에서는 왜 자꾸 베란다와 옷장을 뒤지는지 그 이유를 조금 더 들여다볼까한다.


대략 3년 전 쯤, 당근마켓 앱을 깔고 처음으로 물건을 올려 보았다. 자라 세일기간에 매장에서 산 검정원피스였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올렸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당근!소리가 들렸다. 바로 사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사는 분이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쉽게 정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경찰서 옆 성수2동 주민센터 앞에서 보기로 했다.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 어느 건물이든 말하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어 좋았다. 환불을 위해 번거롭게 매장에 들르지 않아도 됐다. 집에서 몇 걸음만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다음날 저녁, 퇴근하자마자 집에 들러 옷을 담아둔 쇼핑백을 들고 주민센터로 향했다. 도착하니 나와 체구가 비슷한 40대로 초반으로 보이는 귀여운 외모의 어머님 한 분이 서 있었다.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저녁은 먹었는지 물으셨고 물건값 대신 작은 봉투 하나를 건내셨다. 나도 옷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거래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끝으로 다시 집으로 가는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서 아주머니가 준 봉투를 다시 바라보니 어여쁜 꽃무늬가 불빛에 반짝였다. 그 안에 가지런히 꽂힌 만원짜리 한 장과 오천 원짜리 한 장. 봉투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고 고와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지갑에 옮겨 넣고 봉투는 편지만 모아두는 상자를 꺼내다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히 넣었다. 직접 쓴 편지가 들어있는 건 아니었지만 채팅에서 오고 간 따뜻한 문장들, 5분도 안되는 만남에서 오고간 인사말. 그게 편지를 충분히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당근마켓이었다. 그 분이 나와의 거래에 대한 평가를 막 남겼다는 소식이었다. 뒤이어 나도 평가를 남겼다. 서로의 매너온도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당근마켓 어플을 지운 적이 없다. 매일 들어가진 않았지만 따뜻했던 첫 당근 덕분에 ‘언젠가는 필요한 어플’로 여기고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순간은 곧 찾아왔고 이사 갈 집에 둘 하얀 식탁과 의자를 두번째 당근으로 얻었다.


당근마켓에는 매너온도라는 특별한 것이 있다. 처음 가입하면 36.5℃에서 시작하는데 거래에서 얻은 좋은 평가가 쌓일수록 온도는 점점 뜨거워진다. 이 온도는 각자의 중고거래 능력치라고 보면 되는데 어쩌다 36.5℃에 못미치면 거래를 거절 당하기도 한다. 반대로 매너온도 99℃인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고 인증샷을 찍어 올릴만큼 그 가치는 굉장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거래를 해야 100℃ 직전까지 끓어 오를 수 있는걸까.

어느 신문사에서 매너온도 99℃인 분을 직접 만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한다고? 날개 없는 천사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는 무료나눔과 친절거래 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당근모양의 볼펜까지 만들어 나눠주고 있었다. 인터뷰 중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좋아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스스로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조금씩 터득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에게 중고거래는 단순히 물건과 돈을 교환하는 거래의 개념이 아니었다. 배려의 기술을 터득하는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 기술은 700건이나 되는 경험데이터를 통해 시나브로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어느새 매너온도 99도의 배려장인이 된 것이다. 건조하다 못해 팍팍해졌다는 이 세상에서 그가 가진 ‘넘치는 배려'는 불신 섞여있던 중고거래에 대한 인식을 희석시키는 정화기술이기도 했다. 고맙게도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우리 근처에 많다는 사실. 당근마켓의 주황주황한 따뜻하고 다정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 주인공은 사실 이들이 아닌지. 덕분에 우리가 ‘이웃’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게 되었고, 5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서로의 온도를 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건 아닌지. 그 온난한 공기가 멀리멀리 퍼져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기위해 발견한 많은 사실 중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어느 99℃ 배려장인과 거래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래가 끝난 후에도 따로 연락이 와서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그 정도면 거의 대기업S사 수준의 에프터서비스가 아니냐며 다들 놀라워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오히려 그들에겐 너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따뜻하다 못해 뜨껍게 달궈진 그들에게 이 정도 배려쯤은 아무렇지 않게 건넬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몇 ℃일까. 그만큼 누군가를 배려한 적이 있던가. 관심의 방향이 99℃인 당신에게 향하다가 문득 내게로 돌아섰다. 이내 확 식어버린 공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그저 기분 탓일까.



‘당신의 온도는 몇 도인가요?’


글을 읽기 전에 마주한 문장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읽혔는지 모르겠다. 당근마켓에 자꾸 들어가는 이유를 알아보고 싶어 시작한 글이지만 진짜 도착하고 싶었던 건 여기 어디쯤이었다. 당근마켓이 이룬 성공의 열쇠는 중고거래 속에 녹아있던 ‘배려의 온기’였다. 우리가 주고받는게 단순히 때가 지난 장난감이나 몸에 맞지 않는 옷만은 아니었다는 것. 그게 바로 다른 중고마켓이 아니라 굳이 당근마켓을 찾게되는 이유였다. 이왕이면 근처 동네이웃이라는 연결고리를 가진 당신과 내가 잠깐이라도 만나 밥은 먹었는지, 아이가 몇 개월인지, 오늘따라 날씨가 덥다든지 그런 인사라도 건내면서 배려의 온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 아닌지. 이 거래에서 주고받는 진짜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너온도 99도에 빛나는 프로당근러들이 가르쳐준 , 배려도 결국 연습이라는 사실. 쉬운거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쉬워진다는 . 거슬러 오르면 그들도 처음에는 36.5도에서 출발한 당신 근처의 주민이었으니까. 그러니 배려장인이 되는  당신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인 셈이다.


최근 당근마켓 어플에 ‘동네생활'이라는 기능이 새로 생겼는데 실시간으로 글이 올라오는 편이다. 다른 커뮤니티 어플이랑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데, 뭐랄까 글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만 있는게 아니라 그걸 받아주고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주는 소비자가 충분히 있다고나 할까. 비유하자면 현대판 네이버 지식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돌려받는 내공점수 없이도 활발한 소통과 리액션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혼자 운동하기 심심하니 줌으로 만나서 같이 운동할 분을 찾거나, 자주가던 빵집이 사라져서 슬픈데 어디로 옮겼는지 아는 분이 있는지 묻거나, 베란다에서 찍은 기막힌 노을사진을 올려 감동한 순간을 나누기도 한다. 이제는 중고물건 뿐만 아니라 서로의 취미와 일상 나아가 감정까지 나누는 동네 아지트로 성장하고 있다.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이웃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람사이의 불신까지 희석시키는 지점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그 때는 당신에게 배려가 더욱 쉬운 일이 되어 있기를, 당신 근처의 매너온도가 99도에 더 가까워져 있기를 바라본다.



배려도 결국 연습이라는 사실
쉬운거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쉬워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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