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곧 메시지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에쏘런의 종착지는 도덕과 규범이다. 가게 이름으로는 몹시 네모반듯한 교과서 스타일이지만 자리한 동네는 그렇지 못한? 동네에 있다.
이곳은 상수동. 신수동에 이어 도덕과 규범이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오랫동안 마음의 고향 같던 동네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그리고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이 골목에서 보냈다. 놀이터 근처에서 한창 놀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면, 새벽까지 고기 육수 향을 풍기던 돈코츠 라멘집이 있었고, 골목 끝엔 조용하고 예쁜 폰트가 가득하던 카페 히읗이 있었다. 정돈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감각이 넘쳤던 거리였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이 바뀌었고, 그 변화 중 반가운 것이 바로 도덕과 규범이었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나의 취향 친구 Y로부터였으나 그 때는 그저 흘려들었다. 내가 좋아할 거라고 말해주던 그녀의 말은 맞았다. 연재를 따라오신 분들에게는 익숙할 삥타이거 #에쏘런 마포편을 통해서 다시 인지하게 되었다. 눈 내리던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조용히 등장한 한 사람. ‘운동 좀 시켜야 하는 규범이’라 불리며 묵묵히 따라 달리던 장면이 유난히 인상 깊었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이곳의 이름과 닮아 있었다. 도덕과 규범의 ‘규범’은 카페 대표의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을 활용하고 싶어 이렇게 네모반듯한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공간 역시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지향점을 가진 곳이다.
처음 방문한 도덕과 규범의 공간은 독특한 조립식 구조로 꾸며져 있었다. 파이프 모듈 수납장과 크고 작은 재미있는 소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 모든 것엔 이유가 있었다. 인터뷰 영상에서 대표는 “임대공간을 쓰다 보면 내가 애써 바른 벽지, 정성 들여 만든 구조물들이 결국 원상복구라는 이름으로 쓰레기가 되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가능한 모든 구조물을 조립식으로 구성해 다시 분해하고 재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그렇게 구성된 공간은 자유롭지만 허투루 보이지 않고, 곳곳에 성의가 느껴진다.
공간은 메시지다. 말보다 먼저 보여주는 태도이자, 브랜드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접점이다. 도덕과 규범의 공간은 그 점에서 아주 명확하다. 어디로 옮겨가든 반복적으로 구현 가능한 조립식 구조 안에, 단호한 신념과 다정한 감각이 함께 담겨 있다.
에쏘런의 첫 루트로 이곳에 도착한 나는 초보 러너답게 도착하자마자 목이 말라 근처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하나 사 마셨다. 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최근 생긴 어지럼증을 줄이기 위해서인데, 첫 러닝에서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져 잠시 컨디션을 살피고 나서야 카페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신 첫 도규의 에스프레소.
커알못이라 전문적인 표현은 어렵지만, 첫맛부터 놀랄 만큼 맑고 향긋했다. 산뜻한 과일 산미가 느껴졌고, 입안에 쿰쿰한 잔향이 남지 않아 좋았다. 에스프레소를 잘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상하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맛이었다. 마시고 나니 오히려 몸이 조금 더 깨어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도덕과 규범에는 논커피 메뉴가 밀크티 한 가지 뿐이다. 메뉴판도 단출하다. 커피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그래서 더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어 진다는 대표의 말이 인상 깊었다. 커피만을 다루는 단호한 태도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선택의 폭은 좁지만, 그러다 보니 주문도 단순해지고, 생각도 단순해지고, 나도 같이 단순해지는 그 느낌이 좋다.
공간만큼이나 이곳의 사람들도 흥미롭다. 영상에서 주 5일만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면서도, 시험기간엔 홍대 학생들을 위해 커피를 무료 나눔을 하며 그들의 하루를 응원하기도 한다. 평생 한량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인류애 넘치는 장면을 만든다. 느슨한 것 같지만 결이 있고, 가벼운 것 같지만 중심이 있다. 그런 아주 다른 것들의 조화가 도덕과 규범의 기류를 만드는 게 아닐까.
도규에서 커피 외에도 즐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음악이다. 우연히 유튜브를 뒤적이다 발견한 연뚝씨 유튜브 채널에선 도덕과 규범에서 실제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플레이리스트로 정리해 놓았다. 무심코 틀어두다가 문득 웃게 되는, 그들 특유의 장난기 어린 디테일이 숨어 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의 분위기가 음악으로까지 확장되는 경험이 된다.
이곳은 혼자 가도 편하고, 말을 건네는 크루들도 언제나 다정하다. 한없이 친근하면서도, 한없이 나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어디로 갈지 생각하기조차 싫은 날, 그냥 무작정 뛰다 보면 도착하기 좋은 거리.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볍게 나올 수 있는, 그런 멋진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리고 마치 캐러멜을 녹여 만든 것처럼 투명하고 매끄러운 시그니처 잔은, 마시는 순간마저 조금 더 기억에 남게 만든다.
Softpu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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