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만나는 여자, 마담 생망

몽골, 흡수굴 그리고 한국

by 김성냥

한국인 그룹 여행자들과 함께 한 몽골 흡수굴 여행은 또 다른 느낌의 연속이었다. 몽골 초원 여행은 어차피 단독으로 할 수 없었다. 차가 있어야 하고, 차 운전자가 있어야 했다. 몽골 초원에서 한국식 차 운전실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길이 너무 험했고 혹은 길이 아예 없었고, 신호등도 포장도로도 없었다. 그러니 차에 운전자도 따라붙어야 했다. 나에겐 그저 벌판과 초원일 뿐인데 몽골의 운전자는 거기서 길과 어렸을 적 추억을 봤다. 길이 없는 곳으로 차를 몰았고 엉덩이가 아프도록 덜컹거리고 나면 또 길이 보이다 말다 했다. 그렇게 같이 하게 된 그룹 여행은 모스크바까지 이어질 계획이었는데, 난 이르쿠츠크에서 그룹을 떠났다. 몽골 초원을 떠나면 내 나름의 길을 갈 계획이었다.


그룹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숙소와 이동을 고민하고 정보 검색해 이것저것 예약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적지 않은 돈을 맞바꾸어 놓으니, 새로울 것 없는 번거로움이 등장한다. 낯선 사람들과 침실 공유는 기본, 서로 눈치 보고 눙치기도 하고, 약간 미워하기도 하고 혹은 많이 싫어하기도 하고, 맞춰주면서도 또 갈등하는 관계 안에서 지지부진한 번거로움이 자주 나왔다 가끔 없어졌다. 한국인 여행자들과의 그룹 여행에선 한국식 가면이 필요했다. 싫지만 나이, 출신지역, 결혼 여부 등을 따지고 알아서 기는 식의 흐름에 어영부영 동화되었다. 가면은 나중에 벗어버리면 되니까.


그 와중에 우연처럼 찾아온 큰 기쁨도 있었다. 육십을 앞두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단호하게 선언한, 경기도 거주 중인 마담 생망 발견. 마침 마담 성이 이 씨여서 ‘이생망’이라는 이름이 입에 딱 떨어졌다.


몽골 여행이 시작된 첫날, 아침부터 꽤 높은 정상을 향해가는 진흙 밭 트래킹이 이어졌다. 여행 첫날부터 트래킹이라니. 어디 가나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쳐야 직성이 풀리는, 화려하고 인공적인 스포츠웨어의 중년 여행자들을 따라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은 이미 진흙 투성이었지만 풍광은 천상이었고, 한국에선 식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에델바이스가 잡초처럼 길마다 널려 들판을 하얗고 몽글몽글 피어나게 하고 있었다. 알 듯 말 듯 한 향긋한 들꽃 향기가 넘쳐나는 이 몽골 초원에서 만난 꽃들에게 최선을 다한 인간의 반응을 하고 싶은데, 일행들은 자꾸 위로만 움직였다. 이 어여쁜 꽃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만 걸어야 하는 상황. 정상이란 무엇인가, 식의 투덜거림에 걸을 때마다 진흙의 찐득거림까지 달라붙어, 짜증에 심술까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나보다 더 뒤에 처져서 정상이란 무엇인가, 징징대고 있는 낯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두둥, 마담 생망 등장!


KakaoTalk_20221014_142517205.jpg


오호, 신포도 타령을 함께 할 사랑스러운 여자 사람이 나타났다. 정상 가봐야 힘만 들지 별 거 없을 게 분명하다는 기치 아래 우리는 급 친해져, 준비해온 간식과 도시락을 까먹고 바로 하산했다. 몽골 초원 여행에선 피할 수 없는 몽골 최초의 노상 방뇨 경험을 공유했고, 정상 도달의 탐욕에 눈이 먼 그룹 여행 동행들이 돌아올 때까지 초원의 에델바이스와 함께 실컷 놀았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사람과 같이 엉덩이 까고 들판에서 오줌 싸 본 적 있는가? 그 사람은 분명 당신이 언제든 만났어야 할 운명적인 인연을 가지고 당신에게 온 사람이다.


그 후로 마담 생망과 함께 걷고 먹고 마셨다. 낯선 여행자와 우연하게 이어지는 대화에서 이런 즐거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 사람이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십 대에나 할 만한 유치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사람에게 퐁 빠져버렸다. 마담 생망은 진지했고 맑은 눈을 가졌으며 자주 어린아이 같았다. 상처 입었고 커다란 응어리 같은 분노도 느껴졌으나 내내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인자하고 성숙한 사람인데 똥, 방귀, 코딱지 얘기를 좋아했다. 같은 방을 사용할 때 갑작스런 유두 노출로 놀래키거나 가끔 은밀하게 내 엉덩이를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즐기게 되었다.


마담은 우아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다양하고 유니크한 성향이 온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 성직자 같다가 코미디언 같다가. 쌓아놓은 이야기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 오욕칠정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음탕한 얘기도 코드가 맞아 얼마나 낄낄거렸는지, 눈물이 날 때까지 ‘내가 더 저질이야’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 많은 이야기를 교환하며 가끔 여행 자체보다 이 사람에게 더 집중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그 앞에서 홀로 지칠 때까지 머무르리라 다짐했던 흡수굴과 바이칼은 실제 거기에 당도해서도 큰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심지어, 뭐야 양수리와 별다를 게 없군, 싶었으니. 내게 흡수굴, 바이칼 여행은 마담 생망과 눈 마주치고 웃고 이야기 나눈 시간들로 남았다.


이르쿠츠크에서 마담 생망과 헤어질 때 좀 울었다. 나는 내 여행을 계속해야 했고 마담은 그룹을 따라 모스크바까지 올라가려고 한국에서 이미 모든 비용 정산과 비행기 티켓 예매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과 2주 정도 여행을 같이 했을 뿐인데 사람 헤어지는 게 아쉬워 눈물이 다 나다니.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헤어지는 걸 더 좋아한다. 마음을 터놓을 사람을 고르는 데 입맛이란 게 있다면, 내 입맛은 좋은 짜장면을 고르기 위해 10년을 방황하고도 그 짜장면 앞에서 단무지 탓을 할, 까칠함으로 벼려진 마음의 소유자다. 이런 인간이 마담 생망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됐던 것이다. 애써 그 까칠함을 마담 앞에 조금 내어 놓고는 좋은 여행 하라고, 내가 아무리 좋아도 질척이지는 말라고 낄낄 웃으며 포옹하고 났더니 눈물이 참아졌다.


포옹을 푼 마담이 봉투를 하나 쥐어준다. 난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쩝. 마담이 합승택시 타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는 걸 뒤에서 배웅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면 그만이지 싶었는데, 숙소에서 봉투를 열어보고 흐어어어엉 울고 말았다. 카드가 들어 있었는데, 이르쿠츠크 공정무역 가게에서 아껴뒀다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라고 내가 골라준 카드였다. 양털로 만든 몽골 게르 디자인이 따뜻하고 귀여운 카드. 이상하게 오랜 친구를 아주 먼 데 보내고 온 것처럼 서러웠다. 카드를 열어보니 소중한 인연이 꽃말이라는 에델바이스 얘기와 함께 100유로 지폐가 카드 접힌 면을 따라 살포시 흘러내렸다. 아우씨... 콧물까지 흘리며 카드에 얼굴을 묻었다. 여행자에게 돈은 늘 절실하다. 추억도 이야기도 더 간절하다. 이것들을 골고루 넘치도록 내게 안겨준 마담은 한국에서도 꾸준히 만나는 사람이 되었다. 유두 노출 같은 건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마담을 만나면 나는 알아서 선한 사람이 된다. 마담이 참 좋다.



keyword
이전 18화내 돈에 관심 없던 쿠바 아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