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에 관심 없던 쿠바 아주머니

쿠바, 바라코아

by 김성냥

산책을 나섰다가 흰 모래가 있는 것도, 해변이 있는 것도 아닌 플라야 블랑카(흰모래 해변)까지 걷게 되었는데, 또 한 청년이 말을 걸어온다. 에효, 너는 또 뭐냐, 뭐든 말해보거라. 본인도 그냥 산책 중이었다고 길을 안내해주겠단다. 됐고, 어쨌든 고마워! 하고 가는데, 가려는 데가 나랑 같은 방향이라고 따라온다. 친구네 집 간단다. 그럼 내가 피해야겠다 싶어 갈림길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걷고 있는데, 혼자서 이 건물은 병원이고, 저건 학교, 여긴 맹그로브 나뭇잎을 먹고사는 게가 살고... 라며 이것저것 쉬운 영어로 설명해준다. 듣는 것도 걱정된다. 돈 달라고 할까 봐.


쿠바 사람들. 이들은 나를 천국과 지옥으로 하루에도 여러 차례 번갈아 데려다 놓았다. 그들 때문에 이가 갈리다가도, 그들 때문에 오랜 시간 마음에 훈훈함을 간직하기도 했다. 정말 징글맞게 싫기도 했고 가슴이 멍하도록 찐한 감동을 주기도 했었다.


쿠바는 여행자에겐 정말 안전한 나라이기도 했다. 여타 다른 남미 국가들처럼 총기 위협이나 강간, 살인 사건 같은 건 쿠바에선 듣도 보도 못 했다. 소매치기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사소한 사기를 칠 뿐이었다. 난 너의 친구라고, 길을 알려주겠다고, 어디 가서 모히또 한 잔 하자고 말을 건네고 몇 달러를 뜯어갔다. 난 너의 친구도 아니고, 길 안 알려줘도 되고, 너랑은 모히또 안 마실 거라고 얘기하는 것도 지쳤다. 쿠바를 여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모로코의 바가지와 인도의 사기꾼, 그리고 각종 나라마다 다양한, 진드기 같은 호객행위를 경험해봤는지 우선 묻고, 이 셋이 콤보로 닥칠 경우를 감안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러다 도착한 친구네. 플라야 블랑카 가는 길에 있고, 집 문 앞에 ‘(무서운) 개 있다’고 팻말이 있다. 친구네 같이 들어갈래? 묻길래 설마 친구랑 작당해 사기 치는 건가, 잠깐 위험 감지 촉수를 발동시켜봤다. 바닷가에 시야 확 트인 곳에 있는 집. 대지는 수천 평은 되어 보이는데 집은 허름하고 작다. 닭 몇 마리가 개랑 같이 놀고 있고, 무엇보다 친구 어머니가 맞아주시니 가족사기단이 아닌 이상 위험 감지 촉수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집은 무슨 식물원 같다. 사람 키 세 배는 족히 될 바나나 나무도 많고. 더운 날씨에 지치기도 해서 그늘에 앉아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다 나와 나를 구경하고, 산책에 동행했던 그 사람이 쉬운 영어로 통역까지 해줘서 나는 몇 살, 너는 뭐하는 애,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 쉬다가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더니 커피까지 주시길래, 내친김에 배고픈데 먹을 것도 좀 달라고 했다. 난 새침하고 신세 지는 거 싫어하는 편인데,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뻔뻔해지기도 한다.


우와, 여기서 뛰노는 닭이 낳은 계란과 직접 기른 토마토, 앞마당 정원수 역할하는 바나나 나무에서 가져와 튀긴 칩에 레몬주스까지. 그야말로 싱싱한 유기농 텃밭 음식이다. 염치 불구 맛있게 먹었다. 이 호기심 많은 식구들은 삥 둘러 서서 내가 밥 먹는 걸 구경하면서 자기들끼리 스페인어 수다 삼매경이고.



잘 먹고 일어나며 3달러를 아주머니께 드렸다. 돈을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뻔뻔하게 밥을 달라고 한 것이기도 하고. 이미 쿠바 여행 한 달이 다 된 내 감각으로 볼 때 3달러면 받기도 주기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쿠바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현금지급기 정도로 보고 있을 걸 이미 감내하기로 했으므로 돈을 더 달라고 해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하셨다. 음... 이 분은 나의 돈을 거부한 최초의 쿠바인이다!!! 다른 호모 속의 최초 인류 화석을 발견한 고고인류학자처럼 많이 놀랐다. 혹시 겸양인가 싶어 한 번 더 드렸으나 여전히 마다하셨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 사람 비즈니스에 내가 너무 적응해버렸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숙소에 와서 여행자의 돈을 마다한 최초이자 마지막일 쿠바인에게 보답할 것을 골랐다. 한국에서 가져온 나름 좋은 블라우스. 쿠바 노동자 다섯 달 임금은 되는 옷. 입지도 않으면서 쿠바까지 가지고 온 이유가 있었나 보다. 쿠바는 물자가 귀하니 내게 있는 것보다 훨씬 필요한 옷이 될 것이다. 그리고 초콜릿 공장의 정발 초콜릿과 좋은 사람들 만나면 주려고 인사동에서 사 온 한복 입은 인형도 챙겼다.


다음 날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길을 나서 그 집에 다시 찾아갔다. 문에 붙어있는 ‘개 있음’이란 말이 무서워서 문을 못 열고 열심히 문 밖에서 불렀다. 몇 번, 뉘 안 계시오, 를 외쳤더니 다행히 아주머니가 나와서 반겨주셨다. 얘 또 왔네, 또 밥 달래려나 싶은 표정+오다니 신기하네, 표정이셨다.


미리 번역기를 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갔다. 맛있는 밥 줘서 고마웠어요. 잊지 않을게요. 나도 뭔가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받아주시면 기쁠 거예요,를 번역기가 나도 모르는 스페인어로 아주머니에게 전달하는 사이, 아주머니의 표정이 환해졌다. 옷과 초콜릿과 인형을 드렸더니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옷을 갈아입고 나오셨다.



저 블라우스가 내가 가져간 옷. 뭐 이런 걸 다... 하는 표정이셨지만 난 예쁘게 사진 찍어 드리고 싶었다. 이 표정과 포즈가 맘에 안 들어서, 어깨와 얼굴 손과 다리 모양까지 잡아드렸다. 이렇게 하시라고요. 거만하게 모델처럼. 사진을 찍고 보여드렸더니 깜짝 놀라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좋은 기억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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