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했었다
저녁을 먹고 널브러져 유튜브로 재테크 강의를 몇 개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5일 참아 주말 이틀을 바라보고 사는 직장인에게 월요일은 제일 버티기 힘든 시간이지만 '나 죽었소' 하며 있다 보면 하루가 꽤 금방 간다. 그래서 여전히, 흐르는 시간과 가는 내 젊음이 아쉽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다. 중간중간 푸른빛이 어스름 비친다.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번개다. 통창을 두드리는 거센 장마. 폭풍우. 천둥 번개. 그것이 상기시키는 그 여름 일본에서의 밤. 컨테이너 가건물에서의 첫 일주일 정도 밤들은, 무서웠다. 무서워서 노트북에 저장해 두었던 몇 개의 영화를 계속 돌려 틀고 선잠을 잘 만큼. 일본에서의 직장 생활 시작은 그랬다.
여기서도 초반 몇 년은 그랬었나? 아니, 오히려 그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나는 꽤 잘 자는 편이었다. 문제는 헤어지는 도중,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천둥 번개가 치는 새벽이 되면 놀라서 일어나 뭐라도 말소리가 들리는 걸 틀어놓고 벌벌 떨었던 내 모습이 겹쳐진다. 더운 열대가 추웠다. 소름이 돋고 속이 메쓰꺼웠다. 사랑받고 싶었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산산이 깨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바라고 기도했던 몇 년의 시간을 보상받은 게 한없이 감사했었던 내 마음도 송두리째 사라졌던 날.
그는 그 새벽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 이미 우리의 이별이 오고 있는 걸 알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수개월의 밤이 지나고, 그게 습으로 남아 몇 년은 고생을 했을 거다.
오늘 일 끝나고 몇 가지 서류를 정리하다가, 일기장에 포스트잇으로 남겨졌던 몇 장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사랑을 겪기 전의 순진했던 내 모습과 순수한 바람이 거기에 적혀있었다. 나는 속물이 아니려고 노력했던 걸까. 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현실 적인 면을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무작정 잘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시절의 내 다짐들. 불과 5년 전의 글들. 거기에서 이루어진 건 이를 악 물고 버틴 내 직장 생활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인정할 수 있다. 힘들었던 그 시간마저도 나를 위로했던 건, 그와 함께 하려고 했던 미래를 위한 '꿈'이었단 걸.
희망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어떤 새로운 마음이 자리잡기 까지, 참 시간이 많이 지났다. 천둥 번개 치는 잠 못 드는 밤이 참 많이도 지나갔다. 작년이 올해 같았고, 올해가 내년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를 만나기 전의 내 마음자리로 돌아온 거 같다. 까맣게 타서 폐허가 된 자리에, 아무것도 없던 땅에 무언가 자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건만. 스쳐 지나간 잘못된 인연들. 엇갈린 마음들. 그냥 내가 인정해야 했던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내 '텅 빈 마음' 그거 하나였는데. 난 괜찮다고 믿으며 억세게 살다 보니 찬란히 부서져 버렸다. 차라리 일찍 그랬으면 좋았을 걸. 노트에 자꾸 적고 또 적는다.
제행무상.
응무소주 이생기심.
나도 그도, 세상도 사랑도 많이 변했다.
나는 그저 안온하고도, 덜 순진한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이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그랬어야 이런 밤들이 덜 무서웠을 거다.
어느새 휘몰아치던 비가 그쳤다.
가끔 아직도 울고 싶은 밤은 있지만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는다.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