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좀 한다. 한창 때는 소주 두 병에 맥주 3000 cc 정도를 마셔도 너끈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나서 내 얘기를 한참 지껄이고 나면, 그 상대가 누구였든, 늘 죄책감이 들었다. 술은 내게 감정 증폭제였다. 외로울 때 술을 마시면 그 감정에 내가 빠져서 허우적댔고, 누군가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죽어야 마땅할 사람인 것처럼 매도했고, 이별해서 술을 마시면,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폭음하고 괴로워했다. 술 마신 다음 날에는 회의가 몰려왔다. 술자리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내 정서, 그게 문제였다. 내리눌렀던 감정들이 올라오면서 이성이 잠식당하고 마비당하는 느낌. 그래서 술 마실 때는 자제해야 한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얘기는 적당히만 해야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마시는 양이 줄어드니까 그것도 좋다. 혼자 술을 배웠지만,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술 마시며 배운 것도 아이러니이고, 지금 하는 일이 술 마시는 일도 가끔 필요한 영업직인 것도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은 진로 소주를 한 잔 했다. '진로 이즈 백'.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의 1.5리터 짜리 진로 댓고리 병이 생각난다. 그 한 병에 충격적인 도시락용 김 3장을 1인당 1매씩 주며 10명이서 그 한 병을 다 마시라던 선배님들은 지금 잘들 살고 계시는지. 지난 기억들을 추억해본다. 친구도 나도 알고 지낸지는 오래되도 학생 때 이야기는 많이 하지 못했을 만큼, 지난 5년을 서로의 일터에서 고군분투했다. 이제 우리는 해외 생활이 힘은 들어도, 아주 조금 숨통은 트였나 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나름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속이 안 좋아서 요즘 현미밥을 먹는다는 친구의 말에, 아침에 일어나서 당근 + 양배추 + 브로콜리 + 블루베리 따위를 레몬즙과 갈아 마시는 내 일상을 나눈다. 속 편한 게 제일인 지금의 우리 앞에, 현미밥이 주식이던 내 일본인 친구가 생각났다. 벚꽃잎이 살랑살랑 날리던 일본 동경에서의 어느 해 봄, 빛나던 햇살. 나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장학금 지원을 받아 일본에 갔다.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뛸 듯이 기뻤다.
이미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동경에서도 대학교 생활은 처음이었다. 스푸트니크(러시아어로 '동반자')라고 대학교 교환학생 버디 동호회에 가입해서 세계 각지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참 즐거웠다. 에너지가 넘치던 나는 수업도 8개나 수강했고, 혼자 용감하게 요리 동아리에 들었고, 수강이 안 되는 수업에는 교수에게 따로 이메일을 보내 청강이라도 시켜달라고 졸랐다. 약속이 없는 날이면 학교 앞 스튜디오 방에 전에 살던 누군가 두고 간 오븐 토스터로 핫케이크 가루와 버터로 생지를 만들어 파이를 구웠다. 가로로 긴 복도식 방에 덩그러니 놓인 개수대와 냉장고, 욕조가 딸린 욕실. 대여섯 평 남짓한 그 방 안 쪽에는 책상과 티브이, 침대와 창문도 있었다. 내게는 늘 꿈꾸던 독립과 일상이었다. 환경이 바뀌는 건 크나큰 변화인데, 몸이 받는 그 스트레스를 나는 영화랑 노래방, 콘서트랑 문화체험, 그리고 요리로 풀었던 듯하다. 파이가 잘 구워지면 그걸 들고 포트락 파티에 자주 갔다. 돈이 없는 유학생은 슈퍼 시식코너에 가서 재주껏 체리 같은 걸 한 두 개 들고 와서 장식도 하곤 했다. 그러다가 매주 금요일 즈음 근처 유학생들을 불러모아 집에서 들고 온 잡곡으로 밥을 해서 나눠 먹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내가 혼자 밥 먹는 걸 얼마나 끔찍해하는 애인지. 그렇게 인원이 늘면서 판이 점점 커지고 내 방 냉장고는 어느새 술장고가 되어갔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수업은 청강으로 신청한 '영화론' 이란 수업이었다. 100명이 넘는 수강생이 듣는 대형 강의였고, 과제는 영화 보기와 영화평 내기뿐이었다. 늘 눈에 잘 띄는 앞자리 두 번째 즈음에 앉는 보라색 머리 염색을 한 한국인 유학생에게 교수가 질문을 한다. 독재자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 히틀러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누가 있었죠?'
건방진 나는 앞 뒤 다 빼고 '무솔리니'라고 대답한다.
세계사는 좋아했지만 갑자기 지명 당해 심장이 쫄아든 상태였다. 교수는 흡족해하며 아가씨는 엘리트다 뭐 어쩌며 치켜세워 주었다. 테스트당한 거 같아서 얼떨떨했던 수업이 끝난 후 그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건다.
'너 사자에(그때 내 별명. 일본 만화 캐릭터로 뽀글이 파마머리를 한 푸근한 아줌마 캐릭터 - 사자에는 일본어로 '소라'다) 맞지? 스푸트니크에 내 친구가 있어. 네가 그렇게 요리를 잘한다며?'
'아 맞아. 근데 너는 누구야? 누구 친구니?'
'나는 요시야. 내 번호는 이거야, 괜찮으면 다음 주에 영화 수업 과제 나온 영화 같이 보러 안 갈래?'
'어? 어.. 그래.'
그렇게 우연히 다가올 줄은 몰랐다. 꿈꾸던 사랑이란 건 참 우연히 왔다가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또 가버린다. 요시는 독문과 재학 중인, 나보다 한 살 어린 아키타현 (일본의 대표적인 곡창지대) 출신 남자애였다. 건장한 체격에 취미는 베이킹이란다. 풋 하며 웃었더니 자기는 누나가 셋이라서 자연스럽게 요리랑 친해졌다고 했다. 지금은 동경 언저리에 산다던 그는 늘 아버지가 손수 싸주신다는 현미밥이 담긴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왔다. 그래서 내게 그의 별명은 현미군이 되었다. 현미군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랑 비슷하게 에너지가 넘쳤고,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했고, 책임감이 강해서 번아웃이 될 때까지 본인 공부와 제미* (세미나 수업 -대학원 식 토론 수업으로 소수 전공 수업이 대부분이라 많은 과제와 더불어 철저한 준비가 요구됨) 준비, 거기에 본인이 테너로 활동하는 노래 동아리까지, 참 지치지 않고 여러 가지 활동들을 했다. '거기에 연애까지 하자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현미군이나 나나, 둘 다 연애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어디까지 이야기하고 어떻게 상대를 받아주어야 하는지, 그런 건 둘 다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시간이 나면 자연스럽게 같이 밥을 먹고, 약속을 정해서 영화를 보고, 강가를 걸으며 영화나 인생, 혹은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들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서점에 가면 시간을 정해 서로 좋아하는 (그는 건축분야에, 나는 만화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코너에 갔다가 다시 만나 커피를 마시고, 본인들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매 순간이 즐겁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일본애가 아닌데 그를 만나는 게 꺼려지거나 자격지심이 생기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도 내게 일본인 남자애가 아닌 그냥 '현미군'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나는 '사자에' 였을 뿐 이다. 아, 딱 하나, 일본 여자애들처럼 '아 귀여워 (카와이이~~~)' 하면서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는 걸 할 수 없는 것만 빼면, 난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 그 말 만은, 정말, 제발 아무리 고양이 가면을 뒤집어써도 (일본 속담에, 내숭 떤다는 표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으로 그에게 애정을 표현했던 것 같다.
예컨대, 수업에 늦으면서까지 김밥을 말고, 애플파이를 구워 학교에 종종걸음으로 힐까지 신고 20분을 뛰어가던 내가 있다. 현미밥 도시락 하나를 다 먹고도 내가 싸 간 김밥이랑 파이를 먹으면서 '엄마가 해 준 맛이 나' (지금 돌아보면 현미군 아마도 엄마가 안 계셨거나 했던 거 같다) 같은 말을 하던 현미군을 보면 나는 그냥 흐뭇했다. 그때 아마 처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나 이 사람 좋아하는구나. 언젠가는 또 헤어질 이 사람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현미군은 믿음직했다. 가끔 내가 상황에 맞지 않는 일본어 단어 선택을 하면 그는 맞는 단어를 찾아주고, 길 가다 차가 슝 하고 옆을 지나가면 나를 잡아 안아서 도보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으며, 내 어깨에 기대어 졸만큼 피곤한데도 내가 보고 싶다는 감독과의 대담이 패키지로 껴 있는 영화 시사회에도 같이 가 주곤 했다. 친구들에게 기꺼이 나를 소개해 주고, 나는 친해진 독문과 사람들의 성화에 그들의 과 합숙까지 쫓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전날 늦게 까지 우리 집에서 소주를 마신 현미랑 나는 아침 일찍 나가노 행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버스에 앉아서 여섯 시간이나 가야 하는데 맙소사, 배탈이 난 듯했다. 지사제를 안 챙겨 왔는데 이내 식은땀이 비 오듯 오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나를 보자, 그는 버스 앞 쪽에 가서 조용히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친구가 멀미가 난 거 같은데 약이 있으신 분은 나눠주세요'
창피함에 얼굴이 씨뻘개졌다. 나는 진짜 고속도로 위 어디에서 세워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애먼 내 옆 자리 여자 친구의 손을 꼭 붙들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도착한 나가노의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주방에 뛰어가서 정로환 좀 달라고 사정했다. 3박 4일 동안 거의 술만 마셨던 것 같다. 현미군은 합숙 준비회 간부까지 하느라 자투리 시간도 별로 안 났지만, 그는 기꺼이 나를 위해 케이크 데코라는 장기를 보여주었다. 주변에서 야유를 보내며 그런 우리를 봐도 아랑곳 않고 기뻤다. 비록 그와 그 호수를 걷지는 못했지만. 비록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둘 다 서로에게 배려만 하는 우리를 보면서 주변 친구들이 더 성화였다. 얼마 시간이 남지 않지 않았냐고. 서로 고백은 했냐고,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냐고. 현미군에게는 같은 과 친구인 신짱이 있었다. 신짱이 스푸트니크의 내 '버디'였었고 그를 통해 현미군은 나를 알았다. 신짱은 그 이후 얼마 안 가서 자신은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내게 커밍아웃했고, 그러면서 자기는 현미군을 오래 좋아해 왔다고 말했다. 머리가 멍했다. 현미군이랑 난 그냥 남매 같았다. 손 잡는 것도 수줍은, 그러면서 서로 엄청 챙기는 사이. 그냥 그 이상의 어떤 약속도 뭣도 필요하지 않았다. 보면 서로 그냥 마냥 좋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언젠가 그와 갔던 사람 없던 영화관에서 (영화 수업 과제는 대부분 예술 영화였다) '독일어 좀 해봐봐' 하며 장난치던 내게 딱 한 마디 했던 그를. 그의 의미심장한 그 눈을. 왜 더 일찍 알아주지 못했을까.
'Ich liebe dich'
합숙 후 점점 더 바빠진 현미군을 보러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시내 과자점에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내가 살던 학교 주변에서 장장 지하철로 1시간 20분 거리를 설레며 달려갔었다. 나를 보고 놀란 현미군은 점장 몰래 디스카운트를 해 주려고 내 손에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꼭 쥐어주며 금방 웃음이 터질 것 같은 미소를 보냈다. 나는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그 일본 과자점이 최근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한 쇼핑몰에도 생겼다. 우습게도, 나는 거기를 지나치면 그 날의 현미군이 가끔 생각난다. 우리의 이별은 내가 한국에 귀국해야 하는 시점에 그가 독일로 교환 유학을 가게 되면서 찾아왔다.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라고 생각했고, 내게는 취업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던 만큼 나는 멀리 보지 못했다. 그냥 일본에 한 학기 더 눌러있으면서, 좀 더 자유를 만끽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찾고, 현미군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그대로 조금 더 추억하고 있어도 되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급했던 내 결정이 참 많이 후회스럽다. 꼭 어딘가로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한국에 돌아오기 2-3주 정도 전부터 지독한 불면증은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열 시간씩 걸어도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사람과 헤어지기 싫은 내 마음은 그렇게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나는 애써 그걸 외면하고 취업, 운전면허 취득, 졸업 이딴 것들만 생각했다. 당연히 그것들도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이십대에만 할 수 있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지 않던가. 그렇게 귀국해서 3개월쯤 있다가, 나는 자주 읽던 신문 사설 칸 옆의 시 란에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한 행 한 행 읽어나가는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한참을 흐느꼈다. 6개월쯤 지나서 나는 취업을 했고, 다시 6개월쯤 지난 어느 봄 비 오던 날 교보 문고를 다녀오는 길에 문득, 현미군이 궁금해졌다. 독일 생활은 어떤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노트를 뒤져 이메일 주소를 찾아서 안부 이메일을 썼다. 답장이 빨리 왔다. 장문의 답장이었고 거기에는 활기찬 그가 여전히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우리의 나날이 그립다'라는 그의 표현이 좋아서 그 이메일을 출력해 지금도 앨범에 가지고 있다. 이메일은 거기서 그쳤지만 그 이듬해 4월이었던가. 유학시절 친구도 만날 겸 일본으로 혼자 휴가를 떠났다. 현미군과 마지막으로 봤던 지브리 스튜디오 근처의 공원에 갔다. 내가 늘 좋아하던 보라색 천으로 만든 일본식 지갑을 선물로 주면서 살포시 날 안아주던 그날의 그가 생각났다.
"우리가 함께 경험한 일들은 (문맥상 주로 감정적인 면을 이야기) 아무것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거야" 라던 그의 말. 일본어는 다시 생각해도 생략된 의미가 너무 많아서 어렵구나.
나는 그 다음 날 시내에서 아주 먼 그 학교에 가서 스푸트니크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졸업 준비로 과사에 가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는 그 해 졸업생 명단이 출력되어 붙어 있었고 거기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이것 좀 보라며 깔깔거리고 웃던 나와 그녀는 과사를 나와 긴 복도를 걷는데 저쯤에서 낯익고 키 큰 남자가 역시 낯익은 동아리의 다른 친구와 걸어오는 거였다. 그는 꿈에서도 그리던 현미군이었다. 어딘가 낯설었지만 그와 나는 둘 다 적잖이 놀랐다. 마치 절대로 만날 일 없는 곳에서 만나진 사람들처럼. 세상에 어디 '절대'라는 말이 존재하던가. 나는 현미군 옆에 있던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서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제발 그의 새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보챘다.
그렇게 3박 4일 일정의 마지막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가기 전에 다시 교정에 들러 현미군과 만났다. 그때까지 나는 그냥 그와 어떻게 살았는지, 원하는 것에 서로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게 독일에서 미국인 여자 친구를 만났고 지금도 잘 사귀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난 그런 건 어째도 좋았다. 한 때 일상을 나누던 그에게 내 지금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을까? 내 마음 속에는 그를 잡고 싶은 마음이 정말 없었을까?
그의 첫 마디를 듣자 더 이상 일상을 나눌 수는 없겠다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어차피 그때도 우리가 차 한잔 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밖에 없었다. 헤어지고 1년 여를 꼬박 그리워했는데 내게 허락된 건 1시간뿐이구나. 그게 우리 인연의 끝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현미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사자에는 그대로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일어도 잘하고, 여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게 확고해'
그의 눈빛은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투와는 달리 조금, 쓸쓸했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그건 내게는 이렇게 해석이 되는 말이다.
'넌 여전히 너의 자아가 너무 강해서 내가 들어갈 틈이 없구나. 넌 네가 좋아하는 걸 절대 포기하지 않아. 배려가 아니라 요청을 했어야지. 그냥 참지 말고 더 같이 있고 싶고 졸라도 보고 마음껏 해보고 싶은 말들 다 해보지 그랬어. 그랬다면..'
친구에게 현미군의 이야기를 처음 하면서 흥분을 했던지 소주 세 잔에 목소리가 커진다. 그때의 우리처럼 생기발랄한 젊음이 빛나는, BTS의 'Still with you'라는 신보를 들으며 터벅터벅 걸어 집에 왔다. 멜로디며 가사가 오늘의 내 기분과 잘 어울린다. 달빛이랑 닮은 노래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갑자기 108배가 하고 싶어졌다. 현미군과의 인연과 나의 미련이 모두 내 업인 것 같고, 그 기억을 다시 불러올린 오늘의 내 말들이 가시가 되어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텁텁함에, 그 매캐함에. 시를 읽고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채 눈물만 뚝뚝 흘리던 바보 같은 내 모습에. 기도를 올린다. 몰입해서 108배를 하는 데는 17분 정도 걸린다. 몸도 마음도 땀을 흘리고 나면 가벼워진다. 나의 굴레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자유로운데, 내 마음은 가끔 과거에서 길을 잃는다. 술 때문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싶은 내 모습. 이제는 많이 기꺼워졌다. 내 인생에 다시 한번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죄가 허락된다면, 절대 배려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이런 다짐들을 해 보지만 사람이 어디 쉬이 변하리까. 이제 믿을 건 세월 따라 켜켜이 쌓인 내 경험치와, 주변 친구들의 충고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내 두 귀와, 가만히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어야 할 내 마음자리 하나 뿐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