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패, 나의 두려움

도망치려는 자에게 출구는 없다.

by 장서율

코로나 사태 이후 정말 몇 달 만에 친한 친구와 만났다. 어떤 이야기 끝에 몇 년 동안 한 번도 나에게 물은 적 없는 질문을 그녀가 던진다. ‘너는 왜 그렇게 열심히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하려고 하니? 네가 느끼는 감정은 그냥 너야, 너는 그냥 너라고.’ 순간, 그날따라 운동을 하고 나서 핑 돌던 머리가 확 깨었다. 그 질문은 인생의 절반 정도를 이미 살아낸 내게, 새삼스러운 ‘각성’이었다. 순식간에 지난 5년여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영사기의 필름이 촤라락 펼쳐지듯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조금 더 어린 내가 거기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본의는 ‘아니었을’ 정서적 학대 (남존여비사상의 자연스러운 주입식 교육)로 인해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내게, 해외에서 만났던 나의 전남편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마련해 놓은 기반이 없어서 마흔 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던 그가, 나를 놓치기 싫다며 저돌적으로 나왔을 때 나는 어린아이처럼 사랑에 푹 빠져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그의 틀 안에 맞춘 여자로 만들려고 했던 그에게 기대 버렸던 거다. ‘여자가 머리는 길러야 해’ ‘치마 입어야지’ ‘살을 조금만 더 빼면 절세미인이 될 거야’ ‘그만 좀 먹어. 네가 살쪄서 네 배우자가 바람피우면 그건 너의 잘못이야’.


168 cm 키를 가진 나는 그냥 통통한 정도였고, 요리나 와인을 좋아했고, 직업상 사람을 많이 만나야 했기에 나는 나름 나 자신을 잘 꾸미고 유지한다고 생각했었다. 선천적으로 마른 유전자를 타고 난 집안이어서 그럴까, 전남편은 나와 자신의 여동생을 사사건건 비교했다. ‘내 동생은 말랐고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어’ ‘너 SNS에 먹는 사진이 너무 많아서 내 동생이 너랑 친구 관계 끊는다더라’, ‘너의 철없음이 너무 보기 싫대’. 아마 결혼 전에 구애를 하는 남자들이 그렇듯이 사귈 때는 그렇게 크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었을 그였다. 하지만 상견례를 앞두고 우리 집에 첫인사를 오던 그에게, 우리 가족들이 좋아할 만할 선물 리스트를 말하자, 그는 바로 돌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는 너는 우리 집에 인사 올 때 도대체 뭘 사 올 건데?’


그때 나는 그 사람이 결혼해서 얻으려는 것을 파악해야 했고, 거기서 결혼이라는 것을 다시 고려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매했던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와 전시누는 자신들이 진 짐을 덜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다. 적당히 말 잘 듣고, 적당히 이쁘장하고, 적당히 돈 잘 버는, 그러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해 줄 그럴 여자 후보에 내가 뽑혔던 거다. 집안도 학벌도 직업도 모두가 차이나는 결혼이라 주변에서 말렸을 법도 했으나, 사랑에 빠진 나는 그 어떤 충고도 귀담아듣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안일했고,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믿었으며, 특별한 노력 없이도 우리가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혼인 신고를 하고 나서, 둘은 우선 내 통장 잔고부터 노렸다.


법적 동거인이자 안주인인 나와의 상의 없이 많은 일들을 집안에서 했고, 퇴근해서 돌아와 보면 내가 밥 먹는 식탁이 둘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가 있거나, 내 동의 없이 직원을 불러 우리의 신혼집에 머무르게 하거나, 주말에 쉬려고 하면 사업장의 일을 시키거나 하는 건 다반사였다. 동등하게 생활비와 집세를 내도 집안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고, 내가 하는 요리는 종종 그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히거나 많은 힐난을 듣기 일쑤였다. 거기에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내게 사이버 대학 대리 수강 및 심지어 내가 해외 출장을 갔을 때도 리포트를 써내라고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다. 늦은 신혼여행을 갈 때도 사업장의 공동 운영자인 전시누는 내게 4박 5일 이상은 허락해 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그나마 비용도 모두 내 카드로 계산해야 했다. 이쯤 되자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전반적인 회의가 몰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삼 개월여 남짓이었을까.


사실 이 모든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었다.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랑 결혼했는데, 정작 같이 식탁에 앉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될까 말까 했다. 무엇이 그렇게 바빠서 가장 곁에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에게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한 마디 투정이나 잔소리하려고 들면, ‘네가 그런 앤 줄 몰랐다’라는 말로 내 의견을 일갈했다. 회사에서 내가 겪는 힘든 일들을 의논하려 치면, 자신은 피곤하니 듣기 싫다고,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는 자기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나의 말들을 그렇게 부정하고, 기만할 거였으면, 왜 굳이 결혼했을까? 나는 이런 사정을 모르는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식도 올렸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를 선택한 내 결정이 혐오스러워져서, 우울감에 치를 떨었다.


결혼 생활 6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 잘난 전시누는 아이 낳는 문제로 내 친정 엄마에게 한 소리 했다. 해외에 사는 내가 아이를 가져서 낳고도 계속 일 할 수 있게 여기 오셔서 아이를 돌보라는 소리였다. 임신을 한 것도 아니고, 손아래 사람이 상의 없이 웃어른에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타일러도, 세상에 더 이상 안 계시는 전시어머니 대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외래 나에게, 자기 입장에서 ‘사부인’에게 그 정도 말도 못 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나름 유명한 4년제 대학을 나온, 해외 유명 회사에 근무하는 재원이라는 애가 하는 말 꼬락서니가 참담했다. 울고 또 울었다. 그즈음 나는 엄청난 우울감에 시달려서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께 죄스러웠다.


그렇게 결혼 생활 9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나는 이 생활을 계속하다간 내가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즈음 우리는 자주 싸웠고, 그는 다툼 끝에 말끝마다 ‘이혼하자’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울며 수긍했다. 별로 준 것도 없으면서 자기가 사 준 걸 다 내놓으라는 그에게 아연실색하며, 나는 그냥 남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어야 할 모든 시간들이,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채 인생에서 지워야만 할 몇 년 여의 지옥이 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이 나 자신이라니,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그동안 그를 사랑했다고 한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현실감도 없었을뿐더러 그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던 거였다. 내가 하는 일, 입는 옷, 몸매와 말투, 거기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해 제약을 하던 그는, 그냥 말 그대로의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입에 발린 말만 하고 실천할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나 또한 ‘그럴 거면 결혼 왜 했어’라고 비난받을 만하게, 자기 말 안 들은 고깝지 못한 전부인일 뿐일 것이다. 그냥 사랑만 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서로 희생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큰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그는 악의를 품고 한 푼이라도 덜 손해 보기 위해, 결혼 생활 파탄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몰았다. 합의 이혼에 동의해 주지 않고, 견디지 못해 별거를 시작한 나의 임대 주택 앞에 찾아와서는 ‘어떤 놈이랑 살림 차렸는지 봐야겠다’며 길길이 날뛰어서, 결국 경찰을 부르는 참극까지 겪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하고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그 후로 아주 오래 불면증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 사람 자체에게서는 빨리 벗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안도했을 때 일어났다.


너무나 외로운데,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나의 일도 버겁고 내 나이도 이제 어리지 않은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까? 도망치려는 자에게 비상구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 인생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현재 진행형 숙제이다. 나는 굳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 받았다고 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몰라서, 사랑하고 헤어질 때마다 그 어디에도 상처 받지 않은 나는 없었다. 내가 상처 주지 않고 헤어진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나를 어디에서 잃었을까? 그저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 위로해 왔건만.


나의 뼈아픈 결혼 생활의 실패가 가져다준 두려움은 어떤 사람을 조건 없이 믿었을 때, 그리고 내가 외로울 때 내게 사랑을 준 사람을 믿었을 때, 배신당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더 원천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나란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만났어야 했다.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상대가 나를 재형성하는 과정 조차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했던 내 노력이 참 헛되었다는 걸 인정하며 찾아온 공허함이 아프다. 그러고 나서 맞닥뜨린, 지금, 여기의 나는 그저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부디 내 두 발로 똑바로 서서 동등하게 인정받고 인정할 사람 하나를, 인생 남은 나날 동안 만나게 되기를. 아무리 외롭더라도, 함께 노력해 나갈 자신이 없는 상대에게 흔들리는, 자존감 낮은 내가 아니기를 기도한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아부하는 남자의 사탕발림을 믿는 것보다는, 나 자신부터 먼저 믿는 내가 되어야 하기에. 나 이렇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The only reason for our parting was because, he tried to fit me into his mold and, I was not flexible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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