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거자필반 (신과 함께 2)
전생에서 나를 죽였다는 당신을, 현생에서 나는 용서할 수 있을까?
*2018년 여름호 영화 칼럼을 다시 각색했음을 밝힙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이란,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이라고 한다. 출전은 불교 경전의 하나인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되어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속편을 애타게 기다렸던 영화 ‘신과 함께 2: 인과 연’ 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이 대사가 암시하듯, 저승차사 강림(하정우 분)과 덕춘(김향기 분), 해원맥(주지훈 분), 그리고 염라대왕(이정재 분)의 얽히고설킨 전생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편에서 등장했던 원귀이자 귀인 망자 (*저승 차사는 천년 간 49명의 귀인 망자를 찾아서, 그들을 비호하고 변호하여 염라대왕의 재판을 거쳐 내생에 환생시키면, 차사인 자신 또한 환생할 수 있다는 원칙이 영화에 등장한다) 김수홍(김동욱 분)을 이끌어 49일 내 재판을 마쳐야만 하는 차사 강림. 영화의 두 축은 차사 강림과 김수홍의 저승 재판 기와, 염라대왕의 명으로 성주(城主: 한국 민속신앙에서 집을 짓고 지키며 집안의 모든 일이 잘되도록 관장하는 집안의 최고 신이라고 되어 있다) 신(마동석 분)이 비호하는 인간 허춘삼(남일우 분)을 데리고 와야 하는 덕춘과 해원맥의 이야기이다.
법화경은 불교의 경전이고, ‘신과 함께’라는 영화의 원작인 웹툰이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는 저승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므로, 당연히 영화에는 전생과 현생, 그리고 환생에 대한 화두가 많이 등장한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감히 하지 않겠지만, 모든 종교가 이 세 가지 생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크게 흥행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는 이유는, 사랑과 미움, 질투와 원망, 연민과 애증 같은 복잡한 감정들 속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용서’에 대해 전면적으로,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주신은 임금의 얼굴을 그리던 화가로서의 생을 살고 나서, 천년 동안 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하며, 처음부터 악한 인간은 없고 상황이 그렇게 만들 뿐이라고 말한다. 아픈 할아버지 허춘삼이 저승 차사에게 불려 간 뒤 혼자 남을 어린 손자가 안타까워서 현신(現身; 자신의 모습을 드러냄을 말함)이 되어 삼촌 노릇을 할 뿐이라며, 저승 차사에게 초등학교 입학식 때까지만 시간을 유보하게 해 줄 것을 당부하자, 해원맥과 덕춘은 그 대신 자신들의 전생에 누구였는지 알고 싶다며 성주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거래를 하게 된다. 영화에서 저승 차사는, 전생에서의 기억이 지워진 뒤 자신의 소임을 다해 환생할 순간에 그것을 돌려받는다고 되어 있다. 다만 상급 차사 강림의 경우, 염라대왕의 벌로써 전생의 아픈 기억을 천년 동안 안은 채로 소임을 다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과연 ‘인과 연’이라는 부제에 맞게, 세 차사의 전생은 기구하고도 슬펐다.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성주신과 허춘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 차사가 자신들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저지른 과오를 용서할 수 있을까에 그 무게를 두고 있다. 셋의 전생에서의 관계 및 염라대왕의 존재 또한, 엄청난 스포일러이므로, 영화의 재미를 위해 당연히 밝힐 수 없다. 그 반전은 아주 살짝, 스탠리 큐브릭 감독 공포 영화 샤이닝의 Redrum (Murder를 거꾸로 읽음- 문에 칠해진 빨간 글씨로 범인을 암시한다. 영화 속 지역 주민에게 빨리 철거하라고 종용하는 빨간 글씨는 샤이닝의 오마쥬 인지도 모른다. 성주신은 이 위에 열심히, 사람들이 화목하게 부대끼며 사는 모습의 벽화를 덧그린다. 감독이 원하는 화목한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에 버금간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관계에서도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니 또 살짝, 너무 비틀었다는 생각도 든다. 꼭 엔딩 크레디트 후의 보너스 영상을 놓치지 마시고 끝까지 영화 보시고 나오시라.
영화를 보고 나온 나의 단상이다. 현생의 삶은 전생의 성적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생이 내가 잘했던 것만큼 누리러 나온 삶인지, 잘못했던 것만큼 갚으러 나온 삶인지는 누구도 모르고 당사자가 살아봐야만 알겠지만, 또 열심히 살다 보면 내생이라는 것에 더 좋은 모습으로 환생한다고 하였다. ‘인과 연’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는 그 원인이 반드시 있고,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배울 것이 있더라. 난 언제부터 이걸 깨달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신이 시간으로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말을 절감했었고, 인생의 절반 정도 산 것 같은 지금까지도, 내가 이 세상에서 용서하지 못할 일은 그 무엇도 없었다. 혹은, 지금도 용서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 순간순간에는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한들, 나는 지금 여기에서 건강히 숨 쉬고 있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그리고 어쩌면 그리워질지도 모를, 발자국을 남겨 나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나서 2년 여간,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슷한 소재를 본 적이 있었다. '쌍갑포차'나, '구미호뎐' 같은 판타지물에서는 전생의 사연들을 다룬다. 세상을 살면서 아픈 사연 하나 없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받아준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사람들 개개인 속 그들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을지를 알 수 있을 대목이다. 전생의 인연이 어찌 됐든, 현생에서의 삶은 계속된다. 전생에서 내가 악인이었다면 현생에서 그만큼 갚고 살면 된다. 그러면 내생에는 반드시 복이 올 것이라고 믿는 나의 종교는, 그렇다 불자이다. 산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다. 무엇이 그렇게 힘든가? 한 가지 사건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한 없이 나쁠 수도, 또 좋을 수도 있다. 나는 이혼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아주 가깝지는 않았던 동료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과장님, 그동안 억눌려 있던 것들에서 드디어 자유로워 지신 거 같네요. 응원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삶에 있어 내가 기껍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원하는 일이 지금 당장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더 인생을 배워 나가라는 어느 절대자의 뜻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단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 쓰임새를 온전히 다 찾지는 못했으나, ‘나’라는 연장이 조금 더 단단해지면, 세상에 보탬이 되라고 그러시는 것 아닐까, 그 날카로움으로 주변에 상처 주지 않을 만큼 사려 깊어 지라는 그런 뜻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 마음으로부터의 소소한 평화와 행복에 다가서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비가 조금 서러워서, 좋아하는 분홍색 장미 세 송이를 안고 집에 왔다. 이렇게 잠들고 일어나면 내일은 또 어떤 세상이 나를 맞아주려나, 몹시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