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구나

더 이상은 내 문제를 남에게 투사하지 말자

by 장서율

오늘도 종일 비가 온다. 열대기후에 우기라는 건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연말까지 재택근무인 요즘은 비가 오는 운치 있는 날을 내가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원하는 시간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율무차를 저어 마시는 작은 자유가 좋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왠지 그런 시간도 아까우리 만치 일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건데. 이렇게 토닥토닥 내 어깨를 치며 '오늘도 잘 버텼어' 위로해 준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주방에 가서 뚝딱 뚝딱 뭔가를 만들고 있자니, 옆 방 사는 남자가 스윽 입장한다. 사람을 많이 안 만나니까 갑자기 누가 나타나면 새가슴이 된 양 놀라는 요즘의 나이다. 나는 새로 이사 온 옆 방 사람이 처음부터 싫었다. 이유는 누가 봐도 이혼한 티가 팍팍 나는 이삿짐에, 거기 딸린 남자아이도 보기 싫어서였다. 애완동물도 허락 안 되는 집에 애까지 데리고 혼자 이사 나온 것 보면 상황이 안 좋았겠다 싶지만, 시간 날 때마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것도 싫었고, 주말이 되면 전 부인(?)인 것 같은 여자와 다른 애들이 찾아오는 것도 시끄러워서 싫었다. 오죽했으면 이혼했을까, 라며 이해해 줄 아량은 전혀 없는 쌀쌀맞은 나다.


내 옆 방의 전 주인들은 밤 새 시끄럽게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예고 없이 친구들을 몰고 와 시끄러운 술자리를 하다가 집주인에게 쫓겨나거나, 했었다. 셰어 하우스의 공통된 룰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인데, 이번 옆 방 임차인은 집주인 친구라는 이유로 여러 모로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두 싱글인 다른 메이트들도 시선이 곱지는 않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실은 나는 이 사람에게서 자꾸 과거의 남자 친구를 본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애 하나 데리고 이혼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지만, 나도 이혼했으면서, 이런 생각해 본다. '애도 여럿 있는데 그냥 참고 살지 뭘..'. 그러면서 정신 못 차리고 이 여자 저 여자 떠돌던 전 남자 친구도 생각해 본다. '그 사람 같은 배경이었으면 정신이 멀쩡하진 못했을 거 같다'라고.


오늘 처음으로 옆 방 주인에게 한 마디 했다. '애가 하나 있던데, 오늘 온 애는 누구야?' 그랬더니 '자기 전 부인이 데리고 있는 자기 애'란다.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는데 나름 내 방식대로 시끄럽다고 짜증 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굳이 그런 얘길 시킨 게 미안해서 'sorry'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러고선 도망치듯이 부엌에서 나왔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만 말은 안 했으면 하는 그런 관계의 사람으로 옆 방 주인을 정의하면서. 이 집의 누구와도 그렇게 지냈던 적은 없는데 유독 이 사람이 참 싫다. 이런 내 모습이 참 우습고 초라하기 짝이 없구나. 나는 투사를 했던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투영은 일상생활에서 잘 일어나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싫었던 인물이, 실은 자신의 부정적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면을 재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게 투사 작용으로 일어난다. 자신의 측면을 타인에게 투영하다 보면 타인의 태도와 상태를 오판하게 된다. 이 개념은 인격 장애의 치료에서, 의사로 향해지는 분노로서 전문적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정신 분석에서의 대상 관계론의 투영 동일시).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B%A6%AC_%ED%88%AC%EC%98%81)


결국 모든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 지금 현재 조우한 모습이 그 사람의 시작도 끝도 아니고, 우리는 각자의 평행 선상 위 어느 점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 스쳐 지나가며 과거의 내 모습을, 또는 내게 큰 영향을 끼쳤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면서 내리는 비와 함께 이런 생각을 문득 했다.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을까. 그냥 점 위에서 만난 그들도, 나 자신도 비처럼 흘려보내고 용서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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