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매트 위에서 15년

이제 아프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by 장서율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혼자 있으면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종종 내 모습을 혼동할 때가 있다. 하지만 주변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한다. 삶에서 찾아오는 계기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원래 내가 좋아했던 것, 지향했던 삶, 가졌던 목표 등등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어떤 형태로든 마모 혹은 다듬어졌음에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지금의 내 얼굴은, 본래의 나일까 아니면 사회적 맥락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가면일까? 어느 정도는 그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인정하고 살았었는데, 요가 매트 위에서는 그게 되지 않는다. 내 몸에 가장 맞는 바른 자세를 찾아 유지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운동인 요가는, 자기 수련에 가깝다.


내가 요가를 처음 만난 건 2003년이었다. 그때는 서울에서도 그렇게 많은 요가 스튜디오가 운영되지 않을 때였고, 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하나의 사건에 기인해서였다. 그 1년 여 전인가, 나는 친구와 아르바이트를 하러 서울의 어느 골목 언저리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이라고는 해도, 2차선 도로가 면해 있는 어둡지 않은 곳이었고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는데, 하필 길 반대편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무리 지어 오며 일부러 우리 둘에게 자신들의 어깨를 부딪혀 왔다. 그들의 풀린 눈동자와 역한 술냄새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순간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짧은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 순간 자제심을 잃어버린 남자는 우리 둘의 머리채를 낚아채어 전봇대에 세게 박아버렸더랬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그건 명백한 살인 미수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네들은 사라진 뒤였고 한 무리의 구경꾼이 우리를 에워싸고 수군대고 있었다. 그 순간 느낀 건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 : 구경꾼이 많으면 누군가는 약자를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 현상, 심리학 용어)에 대한 냉소적인 두려움보다도, 내가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친구는 그 순간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 이미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못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침 대학교 교양 수업에 '호신술' 이 있어서 한 학기 동안 나름 열심히 수강했다. 니킥도 배우고 여러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는 기술도 배웠지만, 성공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건 순발력과 운동신경이었다. 그 길로 뭐라도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를 따라 재즈 댄스 등록을 했다. 그러나 40분에 걸친 준비 운동은 어느 정도 따라 하겠는데 유연성이 제로인 내 몸에, 재즈 댄스는 아무래도 무리였다(그때 함께 수강했던 친구는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면 남자가 따라오는 게 아니라 배틀이 붙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댄서였다). 그 당시 댄스 스튜디오 A에서는 댄스를, B에서는 요가 수업이 한창이어서, 나는 반을 바꿔 요가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극도로 뻣뻣한 어깨와 근육이 하나도 없는 팔을 가진 내가 낑낑대며 수업에 참여한 지 한 달 여. 명현 현상, 즉 안 좋은 몸이 좋은 상태로 가려고 하는 출발 신호처럼, 나는 1주일 간 열이 펄펄 나서 몸져누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찾아간 수업에서 요가 선생님이 나를 불러 말씀 주시길, 절대로 힘들어도 요가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남들이 3개월 만에 이룰 자세를 나는 1년은 걸릴 몸이니 아파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요가 수련 자격증을 따 보자고 권하셨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기회가 생겨 유학을 갈 때까지 6개월 정도, 나는 열심히 요가 수련을 했다. 그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몸에 맞는 운동을 찾아서였을까 그때 내 표정이 이전에 비해 많이 환해졌었다.


나는 신체 발육이 너무 빨라서 열두 살 때쯤 이미 성인의 몸에 가까웠던 아이였다. 또래들보다 가슴이 큰 게 부끄러워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다. 엄마는 그런 나를 항상 마뜩잖아하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많이 걱정하셨던 것일 거다. 그렇게 그림자를 밟으며 등하교를 하던 내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고등학교 때쯤 되자 아무도 내 어깨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만큼 승모근이 굳어버렸다. 그래도 고 3 때는 새벽 두 시까지 책상에 붙어 앉아 공부를 했다. 그렇게 대학교에 가서도 콘서트 가서 뛰는 것 말고 요가 이전에 했던 내가 운동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요가 매트 위에만 앉으면 아무리 아파도 한 시간을 채워 운동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그 수업 시간 내내 몸과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내게 가장 잘 맞는 자세를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마치 인생처럼. 특히 아픈 자세 교정 후 찾아오는 사바 아사나 (Savasana : 휴식을 취하는 시체 자세) 자세에서, 노력 한 만큼의 삼매(三昧)에 든다. 그 삼매에는 10가지 단계가 있다고 배웠고, 나는 거기서 5단계 정도까지는 가 본 것 같다.


대학교 졸업 후 한 대기업에 입사한 나는, 초반 몇 개월은 직장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침해하는 조금은 '폭력적인' 문화에 반항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씩 겉돌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아팠다. 점심시간에 나는 회사 앞에 있는 요가 스튜디오에 다녔다. 어느 날, 사바 아사나의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참고 있던 서러움이 그대로 흘러내리자 차라리 시원했다. 선생님은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 하셨다. 며칠 후 나는 스튜디오 옆의 정신의학과를 찾았다. 몇 가지 검사와 상담을 마친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만성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기뻤다는 게 맞다. 내가 마음이 아프다는 걸 누군가 한 사람은 인정해 주었다는 생각에, 지지를 받은 것 같아서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내 유년기 시절 상처들 대부분은 가족에게서 온 것이었기에, 나는 식구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고 정신적인 지지를 요청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 고마운,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 내가 남들과 조금은 다른 사고방식, 상처 받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는 걸 인정하자, 조금은 삶이 편해졌다. 살면서 답답했던 순간들에 희미하게나마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 날 이후로도 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었지만,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회복 탄력성 (self-resilience) 이 강했던 나는 나 자신을 나름 잘 극복해왔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열심히 가슴을 펴는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몸을 활처럼 굽혀서 어깨를 젖혀 팔을 벽에 갖다 대는 동작이었는데 아직도 굽어 있는 어깨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제는 재택근무한다고 해서 절대 줄어들지 않는 업무량에 노트북도 과부하가 걸려서 수리를 맡긴 '강제 휴일'이었다. 동료에게 웃으며 이 사실을 말했더니 너무 많이 일하니까 기계도 고장 나지 않냐고 몸 좀 챙기라고 한 소리 들었다. 그간 아득바득 버텨왔다는 생각들이 마음속을 스친 순간 눈물이 또 왈칵 났다. 오래 잊고 있었던 그날의 그 순간처럼. 나는 수업 중간에 탈의실로 뛰어가서 소리 내어 울었다. 또 감정을 내리누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눈이 벌게져 돌아온 내게 요가 선생님이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이 삼매가 오랜만이었다고 대답했고, 선생님은 가슴을 여는 동작에서는 그동안 쌓아둔 감정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해 주었다. 나는 또 깨달았다. 아, 이제 나는 다 나았구나. 또 인생에서 이렇게 한 고비 넘어가는구나. 깨달음에는 참 많은 계기가 필요하구나.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내 삶은 몇 번의 바람 부는 언덕을 지나 다시 찬란한 아침을 맞으려나.


사진 출처 : http://www.w3doctor.com/savasana-corpse-pose-complete-guide-benefits-and-how-to-do-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