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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난요가 Nov 10. 2019

요가는 우아하지 않아

우아하지 않은 요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흔들리고 불안한 지금, 마음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게 요가뿐이다. 어깨 한쪽을 잠시 빌려 고개를 뉘이고 다시 그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넘어지고  아파하면서 나를 다스리면 그뿐이다. 그래서  요즘 요가는 더욱 우스꽝스럽다. 덜컹거리는 철로 위의 기차 칸에서 구름 위를 상상해야 할 정도로. 집중이 힘들고 호흡이 안정적이지 못하니 균형은 말할 것도 없다.


견딜 수 있을 아픔도 지속시키지 못하고 지친다. 다시,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보지만 이내 비집고 드는 생각들에 숨을 내쉬며 세던 숫자를 잊어버리고 만다.


하고 들었던 못된 단어들이 왜 꼭 이때 떠오르는 걸까. 갈리진 상처에 짠물이 들어간 듯 아픈 말들이 떠올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져버리고 앞으로 꽈당. 갑자기 허리가 긴장되고 통증이 생겨 표정은 일그러진다.


웹상에 올렸던 우아한 듯 멋져 보이는 아사나 동작 사진은 시도했던 많은 수련에서 얻어낸 한 장의 사진일 뿐이다. 어떤 사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아픔을 느끼는 중일 때 겨우 찍히기도 했다.  

요가는 절대 우아하지 않다. 우아한 아사나는 신들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다만 요가 명상과 아사나 동작들을 하면서 내면과 몸뚱이를 다스리려는 시도는, 보이는 우아함보다 더 우아한 멋진 시도임은 분명하다. 굳이 넘어지는 사진으로 요가가 우아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 역시 긴 다리도 호리호리한 체형도 아니지만 시도만으로도 자존감을 찾는다. 물론 매일의 수련을 다짐하고도 그렇지 못하는 날들이 많다. 그나마도 핑계뿐인 말과 행동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삼십 대의 마지막 해다.  다른 어느 해보다 수없이 흔들리고 있다. 한없이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내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당연한 듯 상대에게 바라기만  했고 경제적 한계가 이유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대려고만 하기도 했다. 게다가 나이 마흔이 무어라고, 마흔이 넘으면 뭔가 달라져야 할 것 같은 의무감과 압박감이 들었다. 현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라는 단어 때문인가. 아니면 관계들, 그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 낸 불안 때문인가. 불안이 커질수록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어른답지 못한 이들을 보면서 어른 되기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또 안다.  


이외수 작가의 '존버'가 떠오른다. 이미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다. 내게 존버는 최선이 아니었다. 그래서 '존나' 버티지 않아서 자유롭지만 그래서 늘 불안했다. 내가 선택한 대로 살아온 건 운이 좋았다. 대가는 있었지만 늘 따라다니는  불안을 없애기보다 나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아하지 않은 요가로 현재를 직시한다. 나의 한계를 확인한다. 수없이 엎어지고 명상 중에 나오는 오열을 참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다시 시도한다.

그런 내게 우아하지 않은 요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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