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야생암차(岩茶) 한 잔-
어느 날, 이쁘고 날씬한 여자들이 갑자기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는 은밀한 아지트를 가진 이 여자가 나타나자마자. 안지원 ...정연희 작가의 석녀 ( 石女 )라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충격이었다.
여고 1학년 . 못생긴 외모에 기울어져 가는 집안 형편에 나는 거의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청춘이 되어 있었다. 힘들 때면 입 가장자리에 돋아나는 붉은 발진이 그때는 늘 돋아났었다. 그 발진들이 터져 누런 고름과 딱지가 지저분하게 꽃이 핀 얼굴이 싫어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골목길만 골라 등, 하교를 하던 시절이었다. 가장이 간암으로 일찍 사라진 집안이었다. 세탁소, 하숙 으로 홀로 자식들을 건사하시던 엄마가 빚보증과 곗돈 파동으로 도피한 집안. 집은 빚 독촉하는 아줌마들의 소란과 법원에서 날라온 서류로 아수라장이었다. 행여 집마저 잃고 길거리로 나앉을까 봐 근심과 공포의 분위기 .집안에서 구원투수로 보낸 친척할머니는 맨붕 상태 인 내게 다 큰 계집애가 ....하면서 그 와중에 아침밥도 지으라고 강요를 해서 살림에 할머니 시봉까지 하게 된 상황. .죽 ...고 싶었다. 일부러 교실 제일 뒷자리에 앉아 텅 빈 영혼으로 몸만 얹혀 놓고 있었다. 마음은 늘 주눅들고 누구와도 사귈 용기도 에너지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딱 왕따 될 삼박자가 갖추어졌으나 아무도 건들지 못 했던 것은 아마 저 안지원이라는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해서 저 책이 내게 왔는지 모른다.책 살 형편이 못 되었으니 아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겠지. ‘석녀’ 제목부터 충격이었다. 이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쿨한 여자 쯤 되지 않을까. 당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게 된 우리 엄마들의 세계는 여자들이 철저히 남자들의 인생에 종속되는 삶이 었다. ‘여자팔자 두룸박(두레박의 사투리)’이라는 엄마와 엄마친구들의 말에 수궁할 수 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주변에 넘쳐났으니까 . 마을의 오지라퍼인데다 과부였던 우리엄마 ,가뭄에도 유일하게 건재했던 우리집 우물물은 마을 여자들의 인생상담소 쉼터가 되기에 딱이었다. 밖에서 낳아온 남편 자식을 거두면서 딸만 내리낳은 자신의 죄라고 하는 여자, 본실자식과 첩의 자식이 같은 학교에서 만나야 되는 고통을 준 아버지는 당당한데 자신들의 부덕과 무능력의 죄라고 하는 여자 들.... 죄..죄..구질구질하고 절대 닮고 싶지 않는 여자들의 인생들만 넘치는 현실. 그 와중에 도청소재지 도시 평범한 주택가였던 우리 마을에서 만난 초등교사인 원종덕 샘은 현실 속의 롤모델이었다.지금도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남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 버는 모습이 좋았다. 마을 아줌마들은 작고 못 생겨서 남편밥 못 먹고 직장나간다고 비아냥 거리면서 법원차과장 부인, 박소아과 부인의 팔자를 더 높이 쳐주곤 했다. 그 생각에 마구 저항하고 항변하고 싶을 때 원선생님과는 또 다른 격으로 자신 만의 정신이라는 아지트를 가진 안지원이라는 여자 는 내게 구원이었다. 주눅들고 의기소침했던 마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리자 금방 빠져들어가 책 속의 다른 정신들을 만나서 현실을 쿨하게 무시할 수 있는 내공을 키울 수있었다.
본래 이 석녀라는 소설은 극작가인 안지원이라는 여자가 남편의 노름 , 끊임없은 여성 편력 , 부도덕한 직장생활 ,시어머님의 임신강요 같은 진흙탕 같은 현실을 쿨한 자신 만의 정신세계로 구원하여 새로운 버전의 여성상을 제시한 소설이었었다.
안지원씨, 이별할 시간이네요. “차 한 잔 하실래요?”
“차 한 잔 하실래요? ”는“ 밥 한 번 먹읍시다.” 와는 다른 차원입니다.밥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일이라면 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세계로 약간의 비현실적인 환타지가 가미된 정신 세계이기 때문 입니다.밥은 질리지 않는 일상성 일관성이라는 밥의 길이 있고 차는 일상성을 넘어 다소 충동적이고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차의 길이 있습니다
지원씨 . 밥의 길에서 늘 남편에게 배반당하던 당신이 구원의 길로 삼은 것은 영화,예술세계였고 영화배우 백민, 합창단원 하대현, 그 둘을 만나는 장소는 늘 솔로몬이라는 찻집 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는 아지트로 들어가기 위해서 차 한 잔의 티타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남에게 티타임을 만들어주는 찻집아줌마가 된 것도 차라곤 겨우 레몬티만 마셔본 당신에게 좋은 차를 우려주기 위해서 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녹차 한잔 우려 드리겠습니다.
지리산 피아골 기암괴석에서 오랜 세월 야생으로 자란 한국 유일한 야생암차.(岩茶) 그 고차수(古茶樹)찻잎을 수제구포 덖음한 ..고차수 이 암차는 다른 녹차들처럼 끓는 물을 한숨 식혀서 우리는 것이 아니라 열탕으로 금방 우려야 합니다. 아파트 전체가 다실이었던 사진 속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백유잔에 정성껏 한 잔 올립니다.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 프랜차이즈 차음료처럼 자극적인 맛이 금방 확 올라와서 잠시 달콤하고 진한 환타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예상하셨겠지요. 기대가 어긋난 맛이라 실망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고소한 불내음에 잔뜩 기대를 하고 한모금 마시면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씁쓸하고 떫은맛..... 그래도 참고 목을 넘기고 기다리면 뒤늦게 올라오는 깊고 묵직한 고소한 단맛 ...이제까지 먹은 밥의세계 생활의 흔적을 깔끔하게 잊고 잠시 정신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차 한잔.
숨어서 보이지 않던 정신이 눈으로 확인되는 현실로 몸체를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마흔 이후의 얼굴은 부모 아닌 본인 책임이라는 말은 정신이 현실로 나와 실체를 드러내는 시간을 40년으로 본 것입니다. 갈수록 정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티 타임이 사라집니다. 현실로 드러나는 정신의 발효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 일까요. 금방, 바로 ,단박에 라는 조급한 마음이 천천히,조금씩 이라는 마음을 밀어내는 빌어먹을 ... 세상입니다. 여자들에게 자신 만의 고유한 정신세계의 길을 제시한 당신은 그 시대의 락커였습니다.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노래를 당신과 같이 마지막으로 들으면서 .....
차와 락음악은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노 ...노... 차는, 녹차는 정신을 돈으로 환산하는 모든 마실 것에 저항하는 락음료입니다. 단 목소리 높이지 않고 조용하고 겸손한 저항을 하는............
갈수록 정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티 타임이 사라지는 세상에 당신을 내 보냅니다.
당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입니다
굿바이 ! 석녀, 안지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