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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기다림

무수히 많지만 그중 하나 꼽자면 비

by 반바


산불이 나면 중력도 약해지는 걸까. 발이 닿지 않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둥둥 떠 있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수확해야 할 때를 놓쳐버리고 만다. 계획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며칠 전 면사무소에서 수령해 온 감자 박스를 꺼냈다. 행정복지센터였던가? 지금은 바뀐 이름이 있을 텐데 내게는 면사무소라는 이름이 훨씬 더 익숙하다. 겨울바람이 가시기 전, 면에서 공동구매신청을 해서 시세보다 저렴하게 가져온 수미감자다. 한 박스 다 심기에는 양이 많아서 삼장면에 사는 아는 이모와 반을 나눴다.


엄마는 매캐한 공기를 맡으며 데크에 앉아 감자를 쪼갰다. 엄마가 감자를 쪼개는 사이 아빠는 고랑을 높게 올린 밭두둑에 비닐을 씌웠다.


감자는 올해 처음 시도하는 작물이다. 예전에 아는 사람한테 한 박스 산 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심지가 들고 썩어 있어서 반도 못 먹고 버렸다. 그놈의 안면이 뭔지 환불도 못했다. 아까운 감자를 버리면서 엄마는 절대로 감자를 박스단위로 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감자.jpg


그 결심을 깬 건 감자농사를 기똥차게 짓는다는 엄마 친구 덕분이었다. 우연히 맛본 그 집 감자맛에 반해 해마다 박스단위로 사 먹었는데 그 친구가 암에 걸리는 바람에 감자농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별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농사지어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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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방석을 끼고 앉아 나란히 작업에 착수한다. 못 보던 원통형의 도구로 비닐을 착착 뚫으며 감자를 톡톡 집어넣는다.


"아빠 그거 뭔데?"

"이거? 부탄가스통!"


못 보던 원통형의 도구는 윗면을 날려버린 부탄가스통이었다. 통을 비닐 위로 꾹 누르면 동그랗게 비닐이 오려지고 누른 만큼 통 속에 흙이 채워진다. 통을 쏙 뽑아내며 생긴 빈 공간에 감자를 집어넣고 부탄가스통을 살살 흔들면 통속의 흙이 빠져나오며 저절로 구멍이 채워진다.


"아빠 천잰데?"

"유튜브에서 봤다 아이가."


예전에는 유튜브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만물의 모든 이치가 거기에 다 담겨있는 것 같다.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바람이 휙 몰아치며 뿌연 연기가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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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심는 걸 좀 더 보고 싶었는데, 여래가 내 다리를 긁어대는 통에 밭에서 나와 산책을 간다. 나초가 여래의 앞을 얼쩡거려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초는 끄미의 마지막 새끼다. 마지막인 이유는 얼마 전 끄미가 중성화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중성화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뱃속에 새끼가 들어있는 바람에 수술을 할 수 없었다. 그때 뱃속에 있던 애가 바로 나초다.


동배에서 나온 형제들은 떠나거나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나초. 결막염이 걸려 눈도 뜨지 못하는 녀석에게 약을 넣어가며 관리해 줬더니 이렇게 미모의 고양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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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 사라져서 그런 걸까. 유독 외로움을 타는 고양이. 다른 고양이들은 여래만 보면 줄행랑치기 바쁘지만 나초만큼은 그 주위를 얼쩡거린다. 여래도 슬쩍슬쩍 곁눈질을 하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 눈치인데. 아직 아슬아슬한 밀당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간을 보고 있다.


복숭아 자두.png


나도 미뤄왔던 일을 시작했다. 1년을 기다려 온 프로젝트다. 냉장고에 넣어둔 복숭아 나뭇가지를 챙겨 들고 와 자두나무 앞에 섰다. 엄마가 벼르고 있는 나무다. 심은지 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올해도 자두를 열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기에 나한테 한번 맡겨보라고 했다.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고, 이곳에 복숭아 가지를 접붙여서 복숭아나무로 바꿀 계획이다.


작년에 매실나무에 복숭아 가지를 붙이는 내 모습을 보고 아빠는 면전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어찌나 콧바람이 세던지, 혹시 콧물이 나오진 않았나 아빠의 인중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거 그리 하는 기 아이라!"


아빠가 그러는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커터칼로 대충 도려내 이어 붙이고, 절연테이프로 단단히 감싼다. 자른 단면이 마르면 꽃눈이 죽기 때문에 보습이 중요하다. 고민 끝에 바셀린을 덕지덕지 발랐다. 보습엔 바셀린 아니던가. 내 얼렁뚱땅 접붙이기를 보던 아빠는 손에 드릴을 쥐고 나타나 내 복숭아 가지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얌마. 그리 해가지고는 택도 없다. 아부지 하는 거 잘 봐라."


그러더니 매실나무 기중에 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표피를 벗겨낸 복숭아 가지를 꽂고 약품을 덕지덕지 발랐다. 접목할 때 쓰는 약품이라나? 내 어설픈 접목과 달리 꽤 멋을 부린다. 기가 죽어서 한 마디 했다.


"아빠.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이가?"

"짜슥아 잘난 척이 아이고! 니 나중에 봐라 아부지가 복숭아 엄청시리 먹게 해 줄 테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빠의 드릴접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나의 바셀린 접목은 당당히 살아나 매실나무와 한 몸이 되었다. 5cm에 불과했던 길이는 30cm가 넘게 자랐다.


작년의 성공으로 고무된 나는 핵과류 열매가 열리는 모든 나무에 황도 복숭아 가지를 세 개씩 접 붙였다.

복숭아 자두 접붙이기.png


작년의 성공이 초심자의 행운이었을지, 아니면 실력이었을지는 올해 내 접수들에게 달려있다. 제발 살아나길 기도하면서 나무에 찰싹 붙어 접목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긴급안내문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나 놀랐던지 손에 삑사리가 나는 바람에 쪼개기만 해야 하는 대목의 귀퉁이를 전부 날려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산불이 강풍에 번져 삼장면 다간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랑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째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헬기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짐작건대 강풍 때문인 것 같다. 불이 꺼진 줄 알았던 삼당마을과 동당마을에 다시 대피령이 내려졌다. 나는 미처 붙이지 못한 접수를 다시 돌돌 말아 비닐팩에 집어넣었다. 심장이 벌렁거릴 때 연장을 잘못 쓰면 사고 나기 십상이다. 게다가 불이 번지면 접목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재난의 가운데에서 의욕 있게 살기 참 쉽지 않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대피 준비를 했다. 대부분의 짐은 모두 차에 있으므로 노트북과 강아지, 고양이만 챙기면 된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이장님의 전화를,

쏟아지는 비를,

산불 진화 완료 소식을,

내가 사랑하는 평화로운 산골의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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