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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진화 완료

by 반바

토요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불이 난 지 9일째가 되었단 이야기다. 목이 빠져라 주불진화 완료 소식을 기다렸지만, 다들 장기화 우려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불이 꺼졌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화마가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 지독하고 끈질긴 것. 왜 화마라고 하는지 알겠다. 며칠 사이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으로 이재민들과 봉사자들도 추위에 고생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우리는 산불이 시작되고 난방을 하지 못했다.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집이라 장작불을 떼야 난방과 온수 사용이 가능한데 산불로 모든 사람이 고생하는 걸 뻔히 알면서 연기를 뿌릴 수 없었다. 게다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연기 비슷한 것만 봐도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나는데, 괜한 오해를 사는 일도 피하고 싶었다.


3월 말이 다 되었음에도 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샤워를 하는 시간보다 샤워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여름에는 냉수 샤워를 즐기지만 이 날씨에는 사양이다. 제니가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건강과 멘털을 지킨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나는 셀럽이다... 셀럽... 냉수로 건강관리하는 셀럽이다...'


찬물을 뒤집어쓰며 날마다 정신무장을 했다. 나에게는 챙겨야 할 개와 고양이가 있으니까. 산불이 길어지면서 사람들도 지쳐갔다. 갑자기 넘어온 연기에 이장님 부부가 산 위로 정찰을 왔는데, 이모는 우리 집에서 대기하고 아빠와 이장님이 함께 임도로 향했다.


내어드린 차를 호로록 마시던 이모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감 따는 강구 있지예? 그기 천 개가 홀랑 탔는데 흔적도 없는 기라. 플라스틱이라 싹 녹아삣어. 환장할 노릇이지. 차 안에 짐 다 실어놓고, 집에는 딱 씻으러 드가예. 그래가 딱 씻고 바로 튀어나오는 거라. 회관에 죽치고 있다가 불이 이짝으로 넘어온다? 그럼 다 내삐고 진주로 나가버려야지. 이거 사람 할 짓이 아이라. 인자는 지쳐가지고 불탈 거면 타삐라 싶어예."


강구는 과수원에서 쓰는 노란 컨테이너박스를 말한다. 노란 컨테이너가 개당 6천 원이니, 천 개면 6백만 원이 한 시간 사이 홀랑 날아가버린 셈이다. 게다가 불길이 스친 감나무는 앞으로 수확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집을 잃은 사람, 과수원이 전소된 사람도 있는데 피해 봤다고 할 수 있냐며 쓰게 웃었다.


산으로 올라갔던 아빠와 이장님이 돌아왔다. 연기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연기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장님 부부가 떠나고 엄마도 산 아래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 아빠와 각자 책상에 앉아 밀린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가 창 밖을 보더니 엇! 하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빠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도 잡혀있지 않던 터라 반가움은 몇 배나 컸다. 바람이 불긴 했지만, 그게 뭐 대수랴. 갑자기 내렸지만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이장님한테 전화를 하니, 아랫동네에는 비가 내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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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뉴스를 켰더니, 중산리에 사는 주민이 댓글을 달아놓았다. 그곳에도 눈이 펑펑 내린다고 했다. 불이 난 곳에도 필시 바라던 무언가가 내리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비든 눈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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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아쉽게도 삽십 분 정도 내리다 그쳤지만 마당에 깔아 둔 정원석이 흠뻑 젖을 정도로 와 주었다. 희망이 보였다. 99%에서 전혀 변동이 없다 해도 상황은 우리에게 훨씬 유리했다.

다음 날 오후 1시. 주불이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뉴스를 틀어보니 산림청장이 관련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산불이 드디어 잡혔다. 역대 산불 중 두번째로 오래 탄 산불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산불인 동해안 산불과 고작 10분 차이다. 인터뷰하는 산림청장의 뒤쪽으로 소방대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요 며칠 계속 뉴스로 보던 분들이라 눈에 익은 얼굴이 몇몇 있었다. 첫날에는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있었다면 마지막 날인 오늘은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전날도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밤샘을 했다고 한다. 서 계신 분들 중 한 분은 잠을 못 자 눈이 가물가물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감사해서 눈물이 나는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이렇게 산청 산불의 주불이 꺼졌다. 불이 꺼진 다음 날에도 헬기가 돌아다니며 혹시나 불씨가 되살아날까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산불 끄고 나서도 며칠은 감시해야 한다고 한다. 속에 품고 있던 불씨가 언제 되살아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하나 둘 떠났다. 나머지 잔불은 산청군 소속 예방진화대원들이 마무리할 것이다. 안전문자가 와서 확인해 보니 피해신고에 대한 안내다. 이 문자를 받으니 정말 불은 꺼지고, 재건의 단계로 넘어왔다는 게 느껴졌다.


대형 재난과 거리가 멀다 생각했다. 재난의 중심에서 당장 나의 일이 되어 대피를 하는 중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우리 면에도 마을 하나가 통으로 홀랑 타버리고, 과수원과 창고를 잃은 사람이 많다. 곶감의 고장에 살면서 과수원과 창고가 모두 불에 탄 건, 예고 없이 당한 권고사직이나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실업을 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


지난 열흘 간, 뉴스에서 비추는 골목 구석구석, 강변과 산의 모양이 너무 익숙한 곳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바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뉴스에 우리 동네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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