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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챙길 것은?

by 반바

산청군 시천면, 삼장면 인근은 곶감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감나무 과수원도 많다. 이곳 터가 모자라 인근 지역인 하동 옥종까지 가서 감나무 밭을 일구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만큼 감나무는 사시사철 핫한 이야깃거리다. 그 집 감나무 전지를 잘했더라, 거름은 면사무소에서 신청하는 것보다 농협에 신청하는 게 좋더라, 아니다 면사무소가 낫다. 앉은자리에서 과수원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두 시간쯤은 훌쩍 지나는 거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역대 두 번째로 길었다는 산불 때문이다.


-그 집은 홀랑 타버렸더라.

-감나무 밭이 중태에 있었는데 불이 직격으로 내려와서 밭이 통째로 숯덩이가 되었다더라.

-저온창고며 기계며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더라.


집도 감나무밭도 한꺼번에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땐 모두 말을 잃기도 했다.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던 비극이 종이 한 장의 틈을 두고 살갗을 스쳐 지났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유튜브를 켰다. 기자가 머리에 방송사 로고가 크게 박힌 안전모를 쓰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피해 입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집이 다 타서 몸만 나왔다는 할아버지는 신분증을 모두 두고 왔다며 안타까워했고, 강아지를 구하러 몇 번이나 화재현장을 왔다 갔다 했다는 아주머니는 가족의 추억이 담긴 앨범이 모두 타버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불났다고 대피할 적에 뭐부터 챙겼습니까?"


저마다 대답이 달랐다.


"트렁크 열어가지고 비싼 옷부터 잡히는 대로 집어 넣었다예."

"아이고... 나는 손이 떨리 가지고... 일단 패물부터 잡았다 아이가."

"내는 집문서부터 챙겼으. 그거 요새는 700원 주면 인터넷에서 떼준담서? 근데 와 집문서 그기 생각났는가 몰라."


제일 긴박하게 대피했던 날, 엄마는 여행을 떠나고 없었기에 대신 내 이야기를 했다.


우리 딸은예, 개랑 고양이부터 챙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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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옆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시선이 쏠리는 걸 느끼고는 멋쩍게 웃었다. 대피할 때 금붙이나 돈 되는 것을 챙겨야 하는데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니까 그런 건 어떻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났을까 싶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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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할 때 쌌던 짐을 열어보니 개사료, 배변패드, 고양이사료, 휴지, 물티슈, 수건 6장과 비누, 치약, 칫솔이다. 엄마는 짐을 다시 풀어 정리하며 얼척이 없다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럼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인데 당연히 챙겨야지."


기다리던 여래가 고개를 힐끗 들어 쳐다본다. 일이 끝나면 자정이 넘고, 함께 아랫채로 퇴근한다. 바닥을 고수하던 여래가 내 옆을 사수하기 시작한 건 입양 후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침대에 올라올 힘이 없어서 낑낑 거리길래 침대 위로 올려주었더니 그 이후로는 쭉 뜨끈한 침대에서 등을 지지며 잔다.


뛰어내리는 건 관절에 안 좋다길래 박스 안에 전공책을 집어넣어 만든 계단도 기가 막히게 애용한다. 착 달라붙어 어찌나 예쁜 짓을 하는지. 그러니 머리에 빨간불이 도는 위험상황에서 강아지 생각밖에 안나는 거지. 평소에 어디에 애정을 쏟는가가 위기상황에 드러난 거다.


좋아하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이다. 그런데 이번 산불 이후 질문이 한 가지 추가되었다.


"갑자기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챙겨 나올 것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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