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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끝

드디어 건조주의보가 해제되었다.

by 반바

3월 18일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실제로 온 눈은 도넛 위에 뿌린 설탕정도 되려나. 건조한 대지를 적시기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대설주의보 3일 후인 금요일 오후 시천면 어느 산자락에서 시장된 산청산불. 헬기의 고군분투에도 자꾸만 번져가는 화선을 보며 비가 언제 오나 일기예보 어플을 열었다. 야속한 비는 눈치도 없이 다음 주 목요일에나 있었다.


산불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비구름 마저 산불의 열기에 말라버린 듯, 예정되었던 비는 목요일이 되어도 자꾸 뒤로 밀리기만 하더니, 종래에는 예보에서도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 야속해라... 아직 산불의 잔재가 남아있던 토요일. 지표면을 조금 적실 정도로 비가 내리고 감감무소식이 되었다.


택배를 찾으러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어김없이 연기가 풀풀 피어났다. 어제는 저기, 오늘은 여기. 주불 진화 이후에도 마을 하늘은 언제나 헬기가 날아다녔다.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하루에 3번이나 잔불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이제는 헬기소리에 놀라는 척도 않는 여래와 함께 산책을 하고 개털에 코를 묻으면 메마른 흙먼지 냄새가 났다. 비는 언제 오는 걸까.


그토록 기다리던 비는 4월 12일 오후가 되어서야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5시나 되었을까. 툭툭 소리가 날 정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질수록 비는 거세졌다. 잔디 마당에 물이 고여 납작한 슬리퍼 바닥을 적시고 들어왔다. 장마 때나 보던 광경이었다. 잘박 잘박 마당을 가로지르며 아랫채에서 윗채로 올라가는 길. 플래시로 비춘 부분마다 가로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행여나 우산이 뒤집어질까 우산살 부분을 잡고 올라가니, 여래가 화장실이 급했는지 내 발을 벅벅 긁어댄다.


KakaoTalk_20250414_161201820.jpg 비닐봉지와 실링기로 만든 개 비옷


비닐봉지와 실링기로 만든 어설픈 비옷을 입히고 여래와 밖으로 나갔다. 아까보다 비가 더 거세다. 아무리 여기가 지리산 자락이지만, 바람이 12m/s가 넘는다. (5m/s만 넘어가도 집이 날아갈 것 같은데!!!) 이곳에 이사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태풍도 없이 이런 바람은 처음이다. 실외배변하는 강아지는 잘박한 마당을 배회하며 마음에 드는 곳을 찾다가 겨우 일을 치렀다. 비닐이 제 역할을 해 여래는 발만 젖었지만 주인언니는 옴팡 물을 뒤집어썼다. 대충 말리고 자려는데,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집이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쩍쩍 밀리는 소리와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 되었다. 침대의 안쪽은 내가, 침대의 바깥쪽은 여래가 쓰는데 그날은 무서운 지 내 허벅지에 등을 바싹 붙이고 좁디좁은 잠을 청했다. 입양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를 다독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바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난다. 거대한 짐승이 달려와 지붕을 다 뜯어내는 장면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날 밤. 자다가 눈을 떴더니 지붕이 홀랑 날아가고 없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는데 꿈이었다.


여래와 아침 산책을 위해 문을 여니 우리 집에는 심어둔 적 없는 벚꽃 잎이 보인다. 산벚이다. 간밤의 바람을 타고 왔나 보다. 촉촉한 공기 덕분에 숨 쉬는 코가 편안하다. 그 무엇보다 이제 정말로 끝이라는 후련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일요일 오후, 처음으로 산불재난국가위기 단계가 심각에서 경계단계로 내려왔다. 산청 산불이 난 3월 21일 오후 3시부터 재난위기가 하향조정된 4월 12일까지 정확히 267통의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제때에 온 안내문자와 정확한 장소안내로 주민들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심지어 불이 번지기 전에도 진행방향에 있는 마을은 미리 대피하라는 문자가 왔다. 하지만 산불진화현장에 파견 나온 밀양의 화재진압대원들과 공무원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중 한 사람은 엄마 고향사람의 아들이라고 한다. 신혼이고 어린아이가 있다더라, 어린 조카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나왔다더라 실체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이야기의 뒷면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하다.


이번 폭우로 속에 숨어 있던 잔불까지 완전히 꺼졌다고 한다. 그렇게 퍼부어댔으니 제깟 놈이 살아남고 배겨. 득의양양하게 말해보지만 혹시나 속에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을까 두렵다. 불은 꺼졌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트라우마를 남겨놓고 간 화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산불의 나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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