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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P와 J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

목요일, 기다리던 비는 오지 않았다.

by 반바

우리가 대피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경북에도 큰 불이 났다. 최초의 산불 발화지역에 모든 시선이 쏠린 사이,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동해안의 바닷가 마을까지 집어삼켰다. 이상기후로 인한 산불의 대형화를 실제로 목도하고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예보에 비가 잡힌 날은 목요일. 산불 첫날부터 목요일만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드디어 내일이 목요일이다. 취침 전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가니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왔다. 코 속이 찢어질 것 같았는데 간만에 느끼는 촉촉한 공기였다. 대피를 위해 마당에 올려둔 차에 맺힌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데, 아침에 햇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감에 커튼을 젖혔더니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는 없다. 빨리 나가자고 보채는 여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까지는 건조하고 메마른 매캐한 공기였다면 오늘은 축축하고 텁텁한 공기다. 아무렴 어떠랴. 습도가 높고 기온이 낮으면 산불의 확산속도가 현저히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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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도 가득한 과수원을 한 바퀴 돌고와서 여래의 밥을 챙겼다. 보호소에서 올 때 너무 볼품없고, 깡말라 있어서 사료 위에 토핑을 뿌려줘 버릇했더니, 이제 밥 위에 토핑이 없으면5 눈으로 욕을 한다. 반찬이 이게 뭐냐는 듯이. 반찬투정하는 자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쩔 수 없다. 여래는 심장사상충 치료중이다. 우리 집에 와서 때 빼고 광을 냈지만 아직도 오랜 유기생활의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있다. 서둘러 계란 프라이를 하나 구워서 사료 위에 잘게 찢어준다. 사료를 아작아작 씹고 있는 여래의 등을 보는데 검은 깨보다 작은 무엇인가 등을 기어다닌다. 뭔가 싶어서 살펴보니 진드기다. 정수리부터 엉덩이까지 진드기 예방약을 발랐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약을 바른 지 고작 열흘이다. 아까 과수원 제일 하단 풀숲에 다이빙을 했는데 하필 진드기 알집이 있는 곳이었나보다.


테무에서 사기당한 꼬마빗으로 빗으니 아직 피부에 도달하지 못한 진드기가 우수수 떨어진다. 사기당했다고 분노했는데, 꼼꼼하게 빗을 수 있으니 오히려 좋다. 그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습도가 높아지니 그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진드기 알이 오늘 부화한 듯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개털을 붙잡아서 환호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한테 딱 걸렸다. 여래를 붙잡고 머리끝부터 꼬리끝 발끝까지 꼼꼼하게 빗질했다. 돌돌이에 진드기를 한 마리씩 붙이니 스무 마리가 넘는다. 징그러워서 온 몸의 털이 선다. 이제 포장도로만 걷기로 했다.


낮은 기압때문인지 연무가 당최 날아갈 생각을 않는다. 식량 조달을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가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또 엄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묻는 전화다.


비가 좀 와야될낀데. 오늘 온다하긴 했는데 2시에 잡혔는데 4시로 밀리고, 4시 되니까 또 8시로 밀리네예. 예상강수량도 자꾸 줄어드는기 나중에는 이라다가 없어지는가 아잉가 몰라예.

엄마의 예상대로 저녁이 되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늘도 무심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다 잡을 줄 알았건만, 연이은 강풍에 96%까지 오른 진화율은 이틀동안 엎치락 뒤치락하며 답보상태였다.


금요일 오후 2시 넘어서 영덕군을 휩쓴 주불이 진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곧이어 오후 5시 의성 산불도 진화되었다는 반가운 뉴스가 떴다. 산림청 실시간 산불정보에 들어가보니 남은 지역은 산청 하나뿐이었다. 모든 헬기와 지원이 다시 여기로 향한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때는 하동으로 번졌던 불도 모두 끈 상황이었다. 99%까지 올라온 진화율. 정말로 끝이 목전에 다가왔다. 간만에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있는데 벼락같은 알람에 발작하듯 일어났다. 황급히 폰을 들어 확인하니 시계는 오전 6시 1 1분.


시천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삼장면 신촌, 다간마을 및 시천면 원리 동신마을 방면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산청군]


끝인줄 알았는데 밤 사이 강풍에 불이 반대로 번지고 있었다. 우리집 방향이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옷을 꿰어입고 여래의 리드줄을 챙겨들었다. 대피 전에 배변을 해야하는데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라 신호가 안 오나보다. 윗 집에 올라오니 엄마 아빠는 대피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잠옷차림이다.


"옷 안 입어? 왜 이러고 있어?"


내 채근에 아빠가 버럭 화를 낸다.


"괜찮다. 유난 좀 떨지마라. 상황 보고 그때봐서 하면되지 며칠 째 사람을 볶노? 니가 그리하니까 사람이 더 불안해진다이가!"


나도 참지 않는다.


"영덕하고 의성에 cctv 못 봤나? 3분 새에 불똥 다 날라와서 아줌마가 수로로 뛰어 들었다 안 하나? 한 시간을 기어나와서 겨우 살았다하더라. 우리는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어서 다 챙기고 할라면 늦단 말이야! 옷 입고 나갈 준비하고 있는게 뭐 어렵다고?"


"괜찮다 쫌. 헬기가 여기 다 와가지고 퍼붓고 있는데 으이? 제발 쫌."


여기서 한 가지 뜬금없는 정보를 흘려보자면 아빠는 P, 나는 J다. P는 상황을 인식하고 현상을 확인 한 후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반면, J는 상황을 통제하고 모든 정보와 변수를 생각한 뒤에 행동하려 한다. 아빠 입장에서는 상황을 보고 움직이면 된다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가 생겨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게 몹시 큰 스트레스다. 아빠는 자꾸만 자기를 통제하려는 딸과 마누라 때문에 꼭지가 돈다.


"난닝구만 입고서 뭐가 자꾸 괜찮다는건데? 지금 시천면 신촌이 아니라 삼장면 신촌마을이라고. 면사무소보다 북쪽에 불이 붙었다고!"


그제야 엄마랑 아빠가 얼굴을 마주본다.


"시천이 아니라?"

"그래! 아 진짜 답답하네 정말!"


나도 별일이야 없을 거란 걸 안다. 불이 여기까지 오려면 높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걸. 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타들어갈 수도 있지만 강풍에 삽시간에 산 정상에서 우리 집을 향해 아가리를 벌릴 지도 모르는 거다. 대신 준비하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걸 안하고 미루려는 걸 보니 내 속에도 불이 일었다. 아침에 언성을 높인 후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MBTI 이야기를 하며 악수를 나눴다. 성향의 차이임을 아빠도 인정했다. 난닝구만 입고 괜찮다 한 건 아빠가 사과하고, 들들 볶고 짜증 낸 건 내가 사과했다. 서로 사과했지만 생각은 여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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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잔불 정리를 위해 마을 회관으로 떠나고 우리는 임도길로 향했다.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지리산 천왕봉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아직도 진화중이라는데 천왕봉은 의연한 자태로 그 자리를 지킨다. 지금은 바람이 잦아들었지만 새벽까지 강풍이 불어 연무도 모두 걷혔다. 맑은 하늘 아래 우뚝 선 두 개의 봉우리를 보니 저절로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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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다시 번진 곳은 천왕봉 왼편 아래에 있는 구곡산 자락이다. 헬기들이 연신 물을 퍼나르는게 보였다.내려오는 길에 우리보다 산 아래에 사는 성애 이모네 차가 올라온다. 성애 이모도 며칠동안 불안해서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한다. 거의 다 진화된 줄 알았는데 새벽부터 울린 긴급 문자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간다고 했다. 산꼭대기에서 보니 검은 연기가 펄펄 난다고 전화를 주셨다. 알아보니 흰연기는 불이 번지는 연기고, 검은 연기는 물을 뒤집어쓰고 꺼질 때 나는 연기라고 한다.


잔불을 정리하러 갔던 아빠는 1시간도 안 되어 돌아왔다. 아직 주불이 안 잡힌 상황이라 바람이 불면 불 사이에 고립될 수 있다고 일반인은 돌아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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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찌그락 빠그락 소동이 있었던 탓에 눈치를 살피던 개는 지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거의 다 잡힌 것 같은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다. 불타고 있는 화선의 길이는 400m. 운동장 한 바퀴 만큼의 거리인데 진화율 100%는 아스라이 멀기만 하다. P와 J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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