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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우리 동네에 불이 났다

그것도 아주 큰 불

by 반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자급자족과 수렵채집. 신석기 무드로 살아가는 게 나의 꿈이라고 외쳤더니 산골에 들어와 산지도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들어와 사는 곳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어느 산자락이다.

이렇게 말하면 거기가 어딘데? 싶지만 지리산 근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의 생필품은 덕산 5일장과 농협하나로마트에서 구매하는데, 차량으로는 10분 거리지만 걸어서는 한 시간 반 이상을 내려가야 하는 곳이다.


한 마디로 자동차가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곳.


그런데 그제부터 타이어 공기압에 경고등이 뜬다. 외출을 싫어하는데 꼼짝없이 30분 거리의 원지까지 나가야 한다. 금요일 오후라 주말을 앞두고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얼마나 걸릴까요?"


딱딱한 얼굴의 접수직원이 그건 장담할 수 없고요. 대기를 하시던지, 볼일을 보고 오시던지 하면 고쳐놓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 넘어가고 있다.


'오후를 꼬빡 날리겠구먼.'


엄마와 나는 어거지로 생긴 여유시간 동안 경호강변을 산책하고, 도서관 구경도 했다. 하루 만에 여름의 초입처럼 더워진 강변에 앉아 날아다니는 헬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엄마 어디 불이 크게 났나 봐."

"아까 문자 왔던데, 시천면 양수발전소 근처에 불이 났는 갑더라."


목적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라 우리는 다시 블루핸즈로 돌아왔다. 시간은 5시 30분이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공기도 지루하게 정체되어 내부는 답답하고 뜨끈했다. 그때 정적을 깨는 긴급재난 알람이 동시에 울렸다. 졸고 있던 아저씨가 발작을 하듯 일어난 걸 보고 나는 웃지 않은 척하느라 입을 꾹 일자로 다물어야 했다.


"어? 불이 안 잡히나 본데?"


알람이 울리고 잠시 후 모임에 간 줄 알았던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고?

"여기 사람이 많아서요.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모임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영석이 즈그 비닐하우스 맞은편에 불이 엄청시리 크게 났다. 내 영석이 차에 실려가다가 다부 왔다 아이가. 내 좀 태우러 와야겠다

"불이 얼마나 큰데요?"

-말도 못 하게 크다 차 고치자마자 빨리 온나


화재 현장 근처에 아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정비기사님이 타이밍 좋게 공기압을 다 넣었다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서둘러 집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단성교를 건너자, 쭉 뻗은 도로가 펼쳐졌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욱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는 거다. 이곳은 불이 난 곳으로부터 30분은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연기가 퍼져 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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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으로 착각할 만큼 방대한 규모의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공기 중에 슬쩍 매캐함이 섞여 있었다.


"불이 크긴 큰갑다."


시천면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매캐함의 농도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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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국립공원 사무소를 지나자 공기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좌측으로 빠졌을 테지만 아빠가 계신 천평리는 화재가 난 방향으로 더 가까이 가야 했다. 엄마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니! 요 와보니까 불꽃은 안보이고예, 연기만 자욱합니더. 불을 잡았응게 이래 연기만 있는 거 아입니꺼? 일단 내 가보고 다시 전화할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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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석에 앉아 오른쪽 창문을 바라보던 내 눈에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산불조심 깃발이 펄럭일 정도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엄마! 저것 봐라. 여기서 보일 정도면 저 불이 얼마나 크단 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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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평리로 빠지는 곳에 트럭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진입금지 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곡선도로에 가려져 있던 왼편의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트럭 운전자도 산불의 기세에 놀라 차를 멈춘 거였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면적이었다. 불이 띠를 이루고 위쪽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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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하우스가 모여 있는 천평리와 불이 난 곳까지의 거리는 불과 1km.

비화하는 거리가 2km는 된다고 하니, 바람이 조금만 변덕을 부리면 천평리의 모든 딸기하우스가 잿더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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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모여 헬기가 덕천강 물을 퍼올리는 걸 보고 있었다. 눈이 따갑고 숨이 안 쉬어져 미숙이 이모가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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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는 오래된 민가와 전원주택이 혼재되어 있다. 그 앞으로는 생수 공장도 있다. 민가로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소방차들이 불을 번쩍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 S언니 집이 저기 어디쯤인데!"


지난달에 엄마와 같이 줌바 댄스 발표회를 가졌던 회원 언니의 집이 저쪽 동네에 있다. 다들 한 생활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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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체가 거대한 아궁이처럼 변했다.

아빠도 만났으니 이제 집에 가면 되는데 압도적인 광경에 발이 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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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넘어가는데, 헬기는 마지막까지도 강물을 퍼 나른다.

내일 오전에는 바람이 적다는데, 그때까지 끄지 못하면 길어질 것이다.

이곳은 산 자락에 위치한 만큼 바람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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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와중에 한 장의 사진을 받았다.


불지옥이 된 모습이다.

산 아래쪽 푸른 불빛은 불을 끄기 위해 모인 소방차이다.

송전탑에 불이 붙으며 일대가 정전이 되기도 했다.


우리 집은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아직까지는 괜찮다.

다행이란 생각에 가슴을 쓸었다가 곧 죄책감이 밀려왔다.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니. 이거야 말로 '나만 아니면 돼!' 아닌가?


불편한 마음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산불 첫날밤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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