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2. 대피

꺼질 줄 알았던 불이 오히려 더 커져버렸다.

by 반바

새벽 일찍 엄마는 약속되어 있던 여행을 떠났다. 걱정스럽긴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을 취소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끌고 떠났기 때문에 집에는 트럭 한 대가 남았다.


오전 8시에 전화를 해보니 엄마는 약속장소에 도착해 버스로 갈아타고 북쪽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면서도 마음이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별 일 있겠나. 걱정하지 말고 잘 댕기온나. 사진도 많이 찍어오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놀러 간 거면 시원하이 놀고 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장님을 통해 소식을 들으니 밤 사이 산불은 고개를 넘어가 마을 곳곳을 덮친 모양이었다. 얼마나 태워버렸길래 이곳까지 연기가 자욱한 걸까? 연기는 우리 골짜기만 이런 게 아닌 듯, 연무로 인해 헬기가 뜨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후가 되고 바람이 서서히 거세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안 불면 연무가 걷히질 않아 헬기가 뜨지 못하고, 바람이 불면 불이 커진다. 진퇴양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무력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산불이 났다고 하던 걸 안 할 수는 없다. 산책은 나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여래가 좋아한다. 하루에 산책을 5번이나 나가야 하니까. 아침 8시, 12시, 3시, 7시, 취침 전까지. '누구는 개 안 키워봤나 무슨 산책을 그렇게나 나가냐'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여래는 지난 1월 말에 진주시 유기견 보호소에서 입양한 개다. 입양할 때 금수저는 못해줘도 산책수저는 해 줘야겠다는 다짐을 지키느라 진땀이 난다.


문제의 구름은 3시 산책을 하다가 발견했다. 구름 치고는 밀도가 너무 낮고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산책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짧은 산책에 여래의 눈에 불만이 그득하다.


KakaoTalk_20250324_230247769.jpg
KakaoTalk_20250324_230247769_01.jpg

"아빠! 구름이 이상한데? 저거 연기 아니가? 지금 바로 피난짐 싸야겠다."

"피난은 무슨? 우크라이나 전쟁 났다고 피난짐 싸는 놈아!"


아빠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싸려던 짐 일부를 덜어냈다. 사실 뭘 들고 가야 할지도 몰라 옷가지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 구름은 강릉 산불에 봤던 그 거대한 연기 같았다. 혹시 몰라 네이버 지도를 열고 국도 20호선에 배치된 cctv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50324_230247769_02.jpg

화면을 보자마자 다시 캐리어를 열고 짐을 꾸렸다. 아빠의 핀잔은 한 귀로 듣고 흘리고 개사료, 배변패드, 배변봉투, 고양이 사료, 고양이 케이지... 그리고 또 뭘 챙겨야 하나? 긴급 안내문자의 텀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때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행님! 마을 앞산에 불 붙었습니더! 길 막히면 고립되니까네 얼른 내리오이소!!!"


아빠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짐 챙기라!"

"벌써 챙깃따!"


아빠가 가스통을 잠그는 동안 동물 용품으로 가득 찬 가방을 싣고, 아빠 외투와 내 롱패딩을 챙겼다. 23도에 육박하는 기온이지만 혹시나 노숙을 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예민하기 그지없는 고양이를 잡아 케이지 안에 넣었다. 고양이의 통곡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미안하데이. 괜찮다! 언니 요 있다이."


싹싹 빌었다가 안심시켰다가 입에서는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이불로 케이지를 대충 덮어 씌우고 로프를 단단히 쳤다. 아빠의 40년 가구 짬바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어리둥절한 여래와 함께 트럭에 올랐다. 마당의 다섯 냥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김장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두고, 사료를 쏟다시피 부어놓았다. 출발하는 차에서 마당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느그들! 전부 다 꽁꽁 숨어있어라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당부를 알아 들었을까. 심장이 목젖 언저리에서 뛰는 느낌이 들었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1.jpg


불을 피해 내려온 덕산 강변에는 이미 대피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분명 불은 신천에서 시작되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불이 붙게 된 걸까. 불은 천년은 굶은 아귀처럼 무서운 속도로 동네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KakaoTalk_20250324_231626639.jpg


불에 넋을 놓고 있던 사이, 고양이가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렇지 않아도 차 타는 걸 싫어하는 고양이인데 덜컹거리는 트럭의 승차감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있었다. 길 가는 사람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역정을 내는 통에 빈틈이 보이지 않도록 이불로 단단히 감싸야했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2.jpg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3.jpg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4.jpg


강변임을 감안하고도 바람이 거셌다. 바람이 불어칠 때마다 불기둥이 짙은 연기를 뚫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산꼭대기에서 강변을 넘어다 보며, 다음은 너희 차례라고 말하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6.jpg


소방헬기가 부족했는지, 경찰헬기가 한 대 날아오더니 소방 물주머니를 달기 시작했다. 세 번쯤 물을 퍼 올리고, 산 정상에 붓더니 승산이 없다 판단했는지 다른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불이 아니었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5.jpg


헬기가 떠나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연기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산이 아예 가려졌다. 앞산과 뒷산 사이에는 중태마을이 있다. 마을 하나가 연기에 통으로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강변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 안타까움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7.jpg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08.jpg


불이 지나간 자리. 어디선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다시 불씨를 살려내고 있다. 그냥 지나간 걸로 끝내면 좋으련만. 다녀간 자리도 다시 불을 일으킨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10.jpg


진주시 정촌면의 야산을 떠돌다가 산청으로 입양 온 여래의 뒤통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강변에는 강아지와 함께 피난 온 사람들이 보였다. 대피소에 동물이 들어가지 못하니 다들 벤치에 앉아있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KakaoTalk_20250324_230917037_11.jpg

세 시간가량 떠돌다가 집으로 가려는데 불안해서 그냥 들어갈 수 없었다. 불이 난 앞산과 우리 동네 사이의 도로를 돌아보았다. 강폭이 가장 좁은 곳이라 이곳이 가장 위험했다. 하필 강 사이에 바싹 마른 갈대밭이 있었는데, 여차하면 우리 동네로 넘어올 것 같았다. 바람의 방향이 우리 동네와 반대쪽으로 불고 있어서 귀가하는 걸 택했다. 장거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차를 오래 탄 건 오랜만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서둘러 저녁을 먹고, 미처 싸지 못한 사람 짐을 챙겼다. 텐트와 침낭, 이불, 옷가지. 그리고 라면과 부탄가스, 버너를 챙겼다. 대피소로 들어간다는 가정은 애초부터 없었다. 여래는 실외배변을 하기 때문에 새벽에도 종종 나를 깨운다. 무조건 같이 있어야 했다.


짐을 차에 모두 싣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빠는 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하셨는지 잠시 눈을 붙인다고 방에 들어가셨다. 혼자 남아 뉴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이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무시는 아빠를 대신해 전화를 받았다.


"네! 삼촌 아빠 잠시 쉬러 가셨어요."

-지금 느그집 뒷산 한번 볼래? 불이 났다는데 거기서 보이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당장 뒷데크로 뛰어 나갔다. 초저녁때와 달리 연기가 자욱했다. 가시거리가 확연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불은 안 보이는데요. 아까랑 달리 연기가 많이 꼈어요."

-그래? 내가 알아보고 전화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라


올 것이 왔구나.

주무시던 아빠를 깨우고 다시 고양이를 케이지에 넣었다. 두 번째라 그런지 저항이 강했지만, 어쩌겠나 스트레스받아도 같이 살아야 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0분쯤 지났을까. 다시 이장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전화 너머로 이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빨리 내리 오이소! 불 났답니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