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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May 09. 2021

08/ 추기경님의 선종(善終)

지난 4월 27일,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 지난 2월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 이야기, 기도 관련 메시지를 받기도 했었는데, 27일 밤 서울 성모병원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앙 안의 큰 어른,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신 분이 돌아가시는 것은 허전하다는 단어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생전에 많은 역할을 수행하셨지만, 59권의 책을 번역, 저술하신 삶을 사셨다. 추기경님은 90세에 돌아가셨는데, 60년을 사제로 살고 돌아가셨다는 지난 주말의 신부님 강론 말씀에도 그저 살아온 세월이 증명하는 삶 - 그 걸음걸음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하게 됐다.


'나는 추기경 배역을 맡은 것이지요. 옹기장이는 자신의 뜻대로 그릇을 만듭니다. 즉 하느님의 뜻이 나의 배역입니다. 하느님이 연출자이십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 서울대교구 교구 보도자료에는 추기경님의 그간의 강론, 책 속 어록 등을 정리해두었는데 이 말씀 안에서도 어떻게 사시고, 실천하며 지내셨는지  글을 통해서나마 읽어볼 수 있어 다행이다.


추기경님의 빈소는 명동대성당에서 마련되었고, 5일장으로 치러졌다. 입관예절 전에는 유리관에 모신 추기경님을 보고 조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의 기간 동안에는 잊고 있다가 금요일 밤,  ‘아, 입관식 후에는 유리관에 안치된 모습, 뵐 수 없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토요일 아침 일찍 명동성당에 가서 잠시 기도하고, 초를 켜고 곳곳에 있던 추기경님의 말씀이 인쇄된 현수막을 보며 인사드리고 난 뒤 집에 와서 유튜브를 보며 장례미사를 드렸다.


장례미사는 여느 미사와는 다르게 돌아가셔야, 드릴 수 있는 미사다.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열리지 않을 미사이지만 이 마지막 시간의 큰 은총과 감동이 상상 이상으로 크고 깊다. 진정으로 신앙 안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함께 할 수 있다. 여느 미사와 같지만 마지막 부분에 고별예식, 고별사, 고별식을 통해서 한 사람이 맺은 다양한 인간관계 안의 에피소드, 업적, 추억 등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의 삶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돌아가신 분들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삶의 유한함, 아름답게 돌아가는 일에 대한 깨달음 아닐까.


장례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님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많이 허전하다고 하신 말씀을 이제 저도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의지했던 이의 부재를 느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습니다.”라는 말로 강론을 이어가며 눈물을 흘리셨고, 미사 끝에 손희송 주교님은 교구를 대표한 감사인사와 함께 “(정 추기경님은) 밤하늘의 작은 별빛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셨지만, 추기경 님은 큰 별이 되셨습니다. 뒤따르는 저희도, 작은 별이라도 되고자 노력하고 살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셨다.


죽음이 슬픈 건 그 상대의 지혜, 생각, 행동, 마음 등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헤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참 허전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삶이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위로가 된다. 따로 또 같이 그 뜻을 기억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깊은 위안이 된다. 종교 지도자로 한 어른이 세상을 살며 무수히 많은 말, 행동을 통해 사랑을 뿌리고, 전하고 떠나셨다. 떠남 뒤에 남아있는 것,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을 돌아본다. 그 걸음을 뒤따르며 신앙인으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 싶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故 정진석 추기경, 1931~2021)

추기경님의 마지막 말씀이셨다는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둔다. 행복, 하느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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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 장례미사

추모 예식 중 백남용 바오로 신부님 추모사 (교구 원로 사목자)


지극히 공경하올 추기경님 영전에      

사랑하는 추기경님, 제자 백남용입니다.

제가 아직도 이렇게 말버릇이 좋지 않죠.

서울 양반들의 특유하게 느릿한 “응~ 왔어,” 하는 음성이 들리지 않아 왈칵 설움이 앞서네요.  

   

3년간 소신학교에 선생 신부님으로 계실 적에 내내 담임을 맡으셨던 유일한 제자 반이었지만,

저희가 고1 입학식을 한 직후에 부임하셨고, 고3 졸업식을 하기 직전에 다음 이임지로 가셔서

유일한 제자반의 입학식과 졸업식도 참석하지 못하셨음을 두고두고 아쉬워하셨던 스승님.     


서울 교구장으로 오셨을 때, 교구장 취임 축가를 작곡하고 또 연주해드렸더니

“제자 중에 음악가가 있어서 이렇게 나만을 위한 노래를 하나 갖게 된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하시며 행복해하시던 스승님.     

스승의 날이면 추기경 수단 색깔인 주황색 장미 100송이를 들고 인사드리러 가면,

아버지처럼 웃으며 좋아하시던 스승님.      


이런 사연들은 물론 저와 스승님 사이의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과도 비슷한 스토리들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따뜻한 추억들을 남겨놓으시고 이제 저희 곁을 떠나 천국으로 가시는군요.     

그래도 모든 성인들이 이루는 통공 가운데 늘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믿어 위로가 됩니다.      


옴니부스 옴니아 (OMNIBUS OMNIA)

스승님의 스승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모든 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어주시려고 작정하셨던 삶이었으니

추기경님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셨을까요.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주님께서 친히 추기경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참, 한 잔의 와인을 사랑하시는 스승님,

하늘나라에 가시면 예수님 직영 공장에서 나오는 가나 표 와인이 맛이 기가 막히답니다.

이젠 매년 책 한 권씩 쓰시던 수고, 내려놓으시고 천상의 주님 식탁에서 편히 음미해보십시오.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노자로 쓰시라고 남아있는 저희 모두의 마음을 모아 큰 기도 보따리를 싸드립니다.     


추기경님, 살펴 가시고, 편히 쉬십시오.

Logies God in Pace     


2021년 성모성월 첫날에, 제자 사제 백남용 올립니다.


+ 장례미사 속 추도식과 고별예식 속에 다양한 분들의 추도사가 있었고, 나는 제자 신부님의 편지가 무척 좋았다. 며칠 전 유튜브로 미사를 다시 보며, 그 추도사를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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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나 요안나 @lifeisjina


쓰거나 쓰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다양한 인연과 깊은 체험을 이 연재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신설화 @shinseolhwa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만듭니다.

평화의 상점 사라와 카드 숍 P.S. draw and make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요안나의홀리저널 은 매달 2/4주 주일 아침에 연재합니다.


교구 보도자료  |  천주교 서울대교구 - 복음의 기쁨을 증거 하는, 교구 공동체 (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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