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특명

평범한 개발자의 독립 일대기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자, 이거 받아”

“이게 대체 뭔가요?”


나는 다소 삐딱한 어투로 대답하듯 질문을 던졌다. 나 스스로도 그런 건방진 투로 안이사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지극히 무성의하며 관심 없는 단답형 형태의 도발적인 말투라니…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아마도 아래 한글 구버전으로 작성된 문서인 듯했다. 대충 눈으로 흘겨보고 다시 내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투로 대화를 전개해나갔다. 물론 그 대화는 상대방에게만 유익한 그런 일방적인 색채를 띠긴 했지만…


“제안 요청서야. 제안 요청서가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뭐, 그게 무엇인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읽어보고 일정에 차질 빚지 않게 진행하라고”


“제안 요청서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오늘 처음 들어본 단어입니다. 이사님.”


안이사는 마치 항공모함을 오래도록 지휘했지만 어쩌다 재수가 없어 불명예 퇴역한 함장처럼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 요청서란 무엇인가?’ 물론 그 문서가 목적하는 바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문서의 성격과 이뤄야 할 목적에 대해서는 카페 옆자리에 앉은 커플이 노닥거리는 사랑의 속삭임 만큼만 이해할 뿐이다. 그 깊이와 가치에 대해선 제대로 논할 자격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 전문가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내가 여태까지 여자와 사귀지 못한 걸까? 게다가 이건 기계적인 코딩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왜 이과적인 것과 상관없는 사실까지 일일이 알아야 할까.


제안 요청서라는 뭉텅이를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으악, 이라고 종이 뭉치가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 꾸러미라니,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종이로 뭉쳐진 덩어리들을 아무 의식 없이 그러니까 의무적으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최대한 빠르게 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도 그런 종류의 문서들은 언제나 따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더 귀찮고 힘들기만 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을 공손하게 두 손에 높이 들고 눈이 뚫어져라 문장에 집중하는 게 차라리 쉬운 일이다. 이런 걸 읽을 시간에는 차라리 소설 몇 페이지라도 읽는 게 더 유익하다.


제안 요청서에 따르면 그들의 요구 조건에 따라서 우리는,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내가 남몰래 궁리 중인 소설 쓰는 일보다 더 지독하게 골치 아픈 이 작업을 2주 이내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소설 쓰는 일이나 제안서 작업하는 일이나 마감이 있다는 사실은 같다. 하지만 둘이 가진 유사성은 오직 그것뿐이다.


내가 가진 무기는 현재 이 제안 요청서뿐이다. 문제는 나와 경쟁할 무리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적들과 적들의 소굴 정중앙에서 싸움을 펼쳐야 하는데,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오직 나와 싸움을 펼쳐야 하는 형국에 처한 것이다.


제안 요청서의 첫 페이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개발 요구 조건에 따라 치밀하게 뭔가를 준비해서 치밀하게 입력한 다음 치밀한 프로세스에 맞게 온갖 서류들을 치밀하게 업로드하면 된다. 말하자면 빈틈없이 일을 치밀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지령인 것이다. 마치 비밀스러운 공작을 완벽하게 끝내야 하는 첩보원의 임무가 떠올랐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교하지 못한 나와 같은 왕초보 첩보원, 코딩에만 그럴듯한 재주를 가진 인간 말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렇게 의식 없이 문제와 직면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승산이 없는 싸움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지독하게 썩어가는 직장이라는 세계에서 몸으로 겪은 일들이다. 예외는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설계한 이 치밀한 세계에서는 더욱더.


“이사님, 제안 요청서라는 것을 심각하게 들여다봤는데요. 제가 이 업무에 투입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제안서는 영업팀의 김 팀장이나 기획팀의 설 대리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요? 개발자인 제가 이 일을 왜 맡게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납득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타입입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홍대리. 홍대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홍대리가 원하는 대로만 펼쳐질 거라 생각하나? 소설을 좋아하는 홍대리가 잘 알다시피, 상상의 세계는 작가의 의도대로 작동하잖아. 그저 어떤 사건이 터지면 캐릭터에게 몸을 맡기고 그 사건을 이리저리 분석하도록 단서를 던져 주거나 상처를 봉합하고 치료하면 되는 것이지. 이미 일어난 사건에 의미를 대입하려고 노력해 봤자 그런 건 상상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야. 결국 홍대리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만 봉착하고 말겠지. 그러니 의심하지 않고 그 세계에서 캐릭터의 일부분으로서 작동하면 그만이야. 그렇지 않아? 그러니 질문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야. 가서 현실은 벗어버리고 상상의 세계에 뛰어들어 보라고.”


“홍대리의 고민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어. 코딩이라는 일만 대학 졸업 후, 꾸준히 반복해온 사람에게 제안서 작업이라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직장 생활이란 게 어디 우리가 원하는 일만 하면서 펼쳐지는 것이었나? 애초에 그런 일은 우리가 기대한 적이 없었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오늘로서 만 30년 가까이 되는 날이야. 홍대리 생각으로는 나와 같은 부류는 진즉에 퇴물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나의 경험을 반추해 보자면, 난 어딘가에 늘 쓸모가 있었네. 어울리는 일이란 없었지만… 그저 나는 일을 맡아서 해결할 뿐이었지. 그건 냉정하면서도 엄정한 사실이었어. 직감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의심하지 말아.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돼, 그게 직장에 다니는 홍대리에게 주어진 현실이야. 그것이 홍대리가 이곳에 딱정벌레처럼 붙어 있는 이유란 말이야.”


나는 이사의 말을 듣고 물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혀 앞까지 솟구쳐 올랐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마치 나 스스로가 내 의견의 변호인인 된 것처럼 떠든다 한들 그것을 안이사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제로였고 그저 변명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식은 집에 두고 회사에서는 정해진 패턴대로 바보처럼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이자 마지막 수칙이다.


“일단 이사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추상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찰떡 아이스크림처럼 받아들이는 건 제 몫이겠지요.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는 각오로 잘 써보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막막한데 도움을 요청할 만한 분이 혹시 있을까요?”


“그런 건 없어.”


역시 안이사는 내 예상대로 대답했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작업을 지원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대답, 만약 필요하다면 스스로 찾아보라는 것. 아주 강경한 어조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에게 침묵으로 목례한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출력된 제안 요청서를 레이저라도 쏘아대듯이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쏘아 봤을까? 두 시간을 째려봤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 주화입마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은 두어 시간이 흐르도록 알아낸 정보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 넣어야 할 한글 파일엔 여백만 한가득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팀장이 지시한 버그 이슈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상태, 이 일도 못하고 저 일도 못해낸 상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비관 예찬론자다. 선은 언젠가 악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내가 악을 찬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악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득세하는 중이고, 내가 그것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그것을 단지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면 긍정적인 모양새로 흘러가는 것처럼, 비교적 삶은 무탈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온갖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으며, 남아 있는 나날은 잔혹한 악에게 패배해버린 패잔병 같다. 미래는 긍정적이지 않으며 당장 내일도 우리에겐 불투명하게 여겨질 뿐이다.


나는 그 순간 군대의 조반이 생각났다. 아침마다 예의 식판 위에 오르던 그 콩자반과 아무리 뒤져봐도 살 덩어리는 절대 찾을 수 없던 꽁치 뼛조각들의 향연을. 제안 요청서를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에 왜 군 시절의 맛대가리 없는 콩자반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악연과 악연은 교차 편집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냅다 비명을 질러버렸다. 가엽게도 칸막이 앞에서 졸음과 사투를 벌이던 김대리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고 말았지만… 어디에나 희생자는 필요한 것이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또 안이사가 이상한 일이라도 시킨 거야? 왜 그래?”


“아니, 별안간 불러내더니 제안 요청서 뭉치를 던져주는 거야. 난 이런 문서를 처음 봐. 게다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거야. 자긴 정보가 없대. 그러니 나더러 직접 기관에 전화를 넣든 이메일을 보내든 어떤 방식으로는 출구를 찾아보라고 하더라. 아니 정답은 못 가르쳐 주더라도 질문을 제대로 던지도록 힌트는 줘야 할 거 아냐. 안이사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고 윗선에서 오늘 아침에 전달받은 것뿐이래. 적임자가 나뿐이었다나? 아니 대체 왜 나인 거야? 김대리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이야?”


“김대리, 네가 알다시피 나는 뼛속부터 개발자잖아. 비주얼 스튜디오나 만지작거리던 내가 무슨 제안 요청서냐고. 대체 어느 시절부터 개발자가 제안서 작업에 뛰어들었단 말이야. 지금 개발자 뽑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지? 지금 백엔드 개발자는 아예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내가 얼마나 귀한 몸인데 말이야. 카카오 건 네이버 건 회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내가 그런 분이라고.”


"근데 너는 프런트엔드 개발자 아니냐?”


"아니 말이 그렇다고. 내가 백엔드 개발자가 아니라고 해서 갈 데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야. 우린 개발자라는 직업에 명예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그깟 문서 따위, 종잇조각으로 예술을 부린다고 허풍을 쳐대는 기획자들의 문장 농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가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행위 예술 따위에 심취해서는 곤란하잖아. 개발자 자존심이 있지. 우리는 코드의 품질로 승부하는 부류라고.”


“난 이런 게 진짜 적성에 맞지 않다고. 사람이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잖아. 내가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고 Lady Gaga가 입는 그런 별난 옷을 차려입고 무대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개구리는 개구리 연못에서, 가물치는 가물치 늪에서, 개발자는 비주얼 스튜디오가 만든 적당한 풀 안에서 놀아야 하는 거라고. 안 그래?”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홍대리 말이 맞아. 우리에겐 글자가 가득 담긴 매뉴얼보다는 코드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긴 하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문서 작업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썩고 있냐고. 나는 당장 어제 아침에 헤드헌터가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달라는데 아주 곤욕을 치렀잖아. 세상에 나를 이력서 한 줄로 표현하라는 거야. 아니, 세상에 어떻게 나를 한 줄로 표현해? 내가 다룰 수 있는 랭귀지만 열거해도 대충 100줄은 넘을 거야. 아무튼 그 헤드헌터는 이력서를 단 한 줄로 표현해달라고 하더라고. 아마도 그냥 ‘이력서’라고 다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한 줄로 강조했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너무 힘들어. 내가 누구인지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김대리가 공감하며 말했다.


“나도 동감해. 그래서 짜증 나 미치겠어. 나 그냥 이 회사 때려치워버릴까 봐. 이력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안 요청서를 분석할 게 아니라, 당장 이력서부터 업데이트해야겠어. 며칠 전에 내가 노션에 이력서를 만들어 뒀거든, 당장 거기에 접속해 봐야겠어.”


“알았어, 알았다고 문서 작업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지금은 업무 시간이니까 이력서 정리는 나중 일이고 그만 투덜거리고 잠깐 같이 서류를 검토해 보는 건 어때? 마침 내가 좀 전에 커밋을 해놔서 시간이 좀 날 것 같아서 말이야. 같이 분석해 보자고.” 김대리가 팔을 걷어부치며 말했다.


“김대리 그래? 잠깐 시간 내 줄 수 있겠어? 회의실은 내가 예약해놓을게. 기다려봐… 음… 장미룸이 마침 예약이 없네. 내가 바로 여기 2시간만 예약해 놓을 게. 김대리! 마음 바뀌기 전에 바로 가자고. 4시까지만 도워줘.”


김대리 역시 제안서를 써본 경험은 없었다. 그러니 우린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자고 의기투합한 생쥐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얼간이가 머리를 싸매고 회의실에 앉아서 제안 요청서를 꼼꼼히 분석한다고 한들, 예의 이야기는 버그 쪽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서 작업 따위는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써주는 세상이 아닌가,라고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가, 결국 우리 개발자의 운명도 인공지능에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모아졌다. 김대리도 나만큼 염세적인 인간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비교적 코드가 잘 맞는다.


"자, 그러니까 일단 제안 요청서의 목차부터 정리해 보는 거야. 일단 사업의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예산을 검토해 보자고. 음, 그러니까... 기술적인 부분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떠벌이면 되는 거네?"


"그렇지! 그거야. 기술적인 부분과 사업적인 부분을 풀어쓰면 되는 거지. 그런데 풀어쓰려면 뭐 요지가 있어야 하잖아. 핵심이 대체 뭐냐고 나는 이 사업의 핵심이 뭔지도 분간할 수 없겠는걸? 이러다가 아무 결론도 못 내고 예약시간만 끝날 것 같아"


"아, 잠깐만 팀장이 카톡으로 찾는다. 어제 긴급 이슈로 등록됐던 버그가 커밋됐는지 물어보네. 나 가야 할 것 같아. 홍대리 미안해.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다시 찾아보자고. 미안해. 고민 좀 해봐. 다음에 또 봐~ 혹시 자료 입수한 거 있으면 보내줘. 내가 따로 검토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