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평범한 개발자의 독립 일대기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김대리는 자리를 떴으나 흔적은 없었다. 사람은 떠나고 빈자리엔 텅 빈 인간만 남는다. 언제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떠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김대리는 어수선하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곳엔 나 혼자 남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회의실, 아직 예약 시간은 한 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이곳에 앉아서 나는 무엇을 찾아야 하나.


괜히 불을 꺼버렸다. 어두커니 텅 빈 공간에 나의 존재라도 꽉꽉 채워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가동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불 꺼진 고즈넉한 회의실과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나. 하지만 나는 외로움과는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창밖에서 우산을 들고 뛰어가는 바쁜 사람들과 떨어진 거리만큼,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사람들 만큼이나 나는 내 본질과 멀어지는 중이었으므로.


시스템에 접속해서 예약 정보를 수정한 다음, 나는 의자를 책상 앞에 가지런하게 밀어두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칸막이를 거쳐 내 자리로 지나가는데 김대리가 자리에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팀장이 호출해서 버그 수정하러 간다고 한 것 같은데, 자리를 떴다? 뭐, 커피를 마시러 잠시 바깥에 나갔거나 빗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나갔거니 하고 금방 수긍했다. 회사라고 반드시 자리에 죽치고 앉아서 코딩만 해야 한다는 철칙이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에 제안 요청서를 가득 띄워놨다. 벌써 몇 번째 이 문서를 전체 화면으로 놓고 방치해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제안서 작업 따위는 누군가 대신 써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렁 각시라도 홀연 나타나서 짠 하고 일을 끝내주면 참 좋으련만, 이런 일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매주 로또를 사도 5등조차 안되는 나 같은 불운한 인간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메신저 창에서 빨간 불이 깜박깜박 거렸다. 아… 나도 처리해야 할 버그 리스트가 존재했던 것이다. 제안서를 쓰게 되면 누군가 대신 내 이슈를 처리해 줄 거라 착각이라도 한 것 같다. 그런 다정하고 자상한 천사는 현실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대신 코딩을 해주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제안서는 제안서고 코딩은 코딩이다.


따라서 나는 일을 병렬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제안서도 해내고 코딩도 해내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아무리 뇌과학자들이 인간은 싱글 태스킹만 가능하다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강조하더라도 예외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잠시 이슈관리 시스템을 열어봤다. 그리고 등록된 목록을 확인했다. 어제까지 밀려 있던, 그러니까 제안 요청서 분석을 하기 전에 QA가 등록했던 이슈와 더불어 신규로 등록된 버그가 13가지가 추가됐다. 모두 특급, 긴급. 맙소사! 이런 버그 덩어리 같으니라고. 시스템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하릴없이 매일 버그나 양산해대는 내 무능력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리해야 할 내용은 데이터 로거와 그것에 연결된 센서의 처리들이었다. 센서는 데이터로거에 직렬로 연결되고 연결된 수백 가지의 센서는 실시간으로 가공되어 서버에 동시다발적으로 전송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센서에서 시작된 정보가 데이터 로거를 거쳐서 서버에 이르기까지, 아주 우아하게 데이터가 라인을 타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는 우아하게 앉아서 말하자면 다리를 적당하게 꼰 자세로 고개는 15도쯤 옆으로 삐딱하게 숙이고 시선은 될 수 있으면 흐릿하게 떠봤다. 그렇게 했더니 한 결 덜 피곤한 것 같았다. 거기다 더하여 미간을 최대한 찌푸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상파 사나이가 되는 것으로. 이런 자세를 취하면 남들이 보기에 꽤 성실하게 코딩하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수백 가지 센서를 하나의 전문으로 만들어 놓은 후, 나는 전문에 따라 멀티 스레드로 입력과 출력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만들었다. 말하자면 시소가 양쪽에서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예측한 대로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은행에서 성격 급한 노인이 대기표를 뽑아가듯이 줄줄이 입수되는 중이었고 다시 그것은 특정한 알고리즘에 따라 가공되고, 다시 초고속 라인을 타고 서버 데이터베이스에 착착 쌓였다.


물 흐르듯 모든 상황이 낙관적이었다. 오류는 없고 모든 데이터의 밸런스가 맞으니 표류하는 건 없었다. 예외가 있다? 그것은 예외 처리 목록이 담당한다. 나는 그렇게 4시에 시작한 코딩을 저녁 9시가 되어서 겨우 끝마쳤다. 세상에 5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심지어는 누군가 책상 위에 놓아둔 샌드위치가 말라비틀어지는 것도 모르고 집중했다. 그야말로 지독한 열코딩이었다.


그런데 현타가 오는 이유는 뭘까? 제안 요청서를 담은 아래 한글이 샌드박스에서 발광했다. 나 좀 어떻게 해달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코딩이 재밌다. 제안서는 재미없다. 노잼인 일을 왜 해야 하는가. 그러니 나는 회사를 때려치워야 하나? 그런데 김대리는 어디에 간 걸까? 팀장 호출 후 같이 고민하자던 김대리가 보이지 않았다. 알게 뭐랴. 내가 집중하는 사이에 남몰래 퇴근했을 지도 모를 일이니. 나도 퇴근이나 하고 보자. 일단 오늘은 기력을 소진했으니 당이라도 좀 채워야겠다.


1 Week Later : D-5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공연히 시간만 허비한 것이다. 이제 입이 바짝 타들어가고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해야 하는 상황인데, 비관적인 내가 이상하게 걱정을 통 하지 않는다. 마음이 이렇게 편한 이유는 뭘까, 알 수 없었다.


칸막이 건너편의 김대리는 요즘 이상하게 바빠 보였다.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커피 마시러 가자며, 버그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고 떠벌리던 김대리의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마도 처리해야 할 버그 목록이 꽤 늘어났나 보다. 그래, 김대리는 나보다 코딩 능력이 조금 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묵언수행이라도 해야지. 버그는 제때 처리했어야지. 그런 걸 모아봤자, 책장에 쌓인 디비디 컬렉션이 될 수 없는 거니까. 버그는 생각날 때마다 쳐내야 한다. 나처럼 말이다.


그 순간 길박사 생각이 났다. 맞아! 길박사라면 제안서 작업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길박사와는 몇 달 전에 L화학 프로젝트를 같이 할 때, 인연을 맺었다. 옆자리에서 제안서 쓰는 걸 신기해하며 구경한 적이 있지 않았나? 대학원에서 지겹게 제안서 작업에 열중인 길박사에게 문의를 해보면 분명 뭔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길박사에게 연락을 해보자. 아직 나에게는 5일이나 남지 않았나. 그 정도 데드라인이면 충분하다. 암암.


마감을 4일 앞둔 오후 길박사와 점심 약속을 했다. 길박사의 연구실인 신촌 근처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회사에는 현장 조사 관계로 외출힌다고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다. 현재 우리 팀의 매니저는 공석인 상태고(퇴사) 사실상 나는 거의 내 마음대로 스케줄을 잡고 빨랫줄처럼 일을 당겼다가 놓았다 하는 형편이니까. 내 행동에 대해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나는 회사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중이다. 적어도 제안서 쓰는 일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신촌 로터리에서 만난 길박사는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뭔가에 고무된 사람처럼 보였다. 중요한 국가 프로젝트라도 성사시킨 걸까? 이대로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길박사일지라도 뭔가 유용한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아무튼 길박사는 4거리 대각선 건너편에서부터 두 손을 들고 크게 흔들며 나와의 만남을 크게 반기는 눈치였다. 나는 겉으로는 적어도 그 환대에 반응하려 나름 성심성의껏 노력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사람처럼 의도된 행위를 보여줘야 하는지 이해하기 곤란하기도 했다.


길박사는 나와 마주치기 무섭게, 그 두껍고 스타워즈에 나오는 추바카의 털 뭉치 같은 손을 내밀며 내 손을 아주 크게 흔들어댔다. 반갑다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파편을 튀기며 물었지만, 사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도 내 귀에 흡수되지 않았다.


자신이 근 몇 달 동안 진행하던 중대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오늘 오전에 받아냈으며,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걱정 없이 그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며, 자신이 박사라는 사실이 인쇄된 명함에 걸맞은 일을 하게 됐다는 그런 자화자찬 일색의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희소식에 최대한 크게 리액션을 가하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칭찬이 담긴 표현을 서슴지 않아가며, 마치 아마존 밀림에서 숨어 있던 새로운 생물체를 발견해낸 탐험가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우린 끈적한 포옹이라도 나눠야 했을까?


반가운 인사 이후 예의 그만의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가 말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사건의 진상을 듣고 나서는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그가 안내한 곳은 신촌의 어느 은밀한 중식당이었다. 간판에는 분명히 중식당이라는 글자가 찍혀있긴 했지만, 그곳은 엄밀히 말한다면 중식당이 아니라 분식집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식당인지 분식집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빨간 명패가 걸린 식당에 우리는 자리를 잡고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어떤 메뉴든 골라도 괜찮다고 말해놓고 길박사는 1초의 고민 없이 짜장면 일반이라고 주문서에 적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나는 그의 명석한 판단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떤 메뉴를 고를 것인가, 라는 고민은 이곳에서 적어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안도했다. 그렇게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 귀찮은 프로세스를 거칠 필요 없이 결정이 단 한 방에 이뤄지자, 길박사는 자신의 박사라는 무게에 걸맞게 주문서를 받아 드는 종업원에게 ‘군만두는 서비스로 주나요?'라고 물었다. 언제부터 중국집이 짜장면 두 개를 시키면 군만두를 서비스로 주는 걸까? 음, 신촌에서는 그게 국룰일지도, 만약 그게 룰이라면 따르면 그만이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허락되지 않지만… 박사는 짜장면을 한 그릇 시키고 나는 덤으로 군만두 4개를 공짜로 먹는다.


짜장면이 나오자마자, 길박사는 짜장면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면과 양파와 온갖 걸쭉한 양념과 기름기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길박사의 정수리와 목덜미뿐이었다. 한 인간이 짜장면 한 그릇을 얼마나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지 나에게 시연했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한 내 짜장면을 그에게 양보해야 하는 건 아닌지 순간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막 면치기를 끝냈을 때, 추가로 짜장면 곱빼기를 주문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에 잠시 일렁였던 양보란 것은 접어두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날 길박사와 나와의 만남이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시점에서 나는 어떤 확신을 타인에게서 얻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이미 정의되어 있는 인생의 방향 같은 것들을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그저 잠시 잠깐 프로젝트를 동료로서 함께 한, 말하자면 타인에게 조언을 듣는 것이 아닌, 간접적으로나마 내 생각을 더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 의미도 없는 실체를 통해서.


식사가 끝나자, 그는 바로 폭풍랩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방송이 종료되자마자 마치 숨겨둔 후일담을 전하는 연예인처럼 말이다.


“홍대리님, 제가 아까 중대한 프로젝트가 결정됐다고 말했잖아요. 그게 뭔지 알아요? 하하하. 아마 대리님은 중대한 그 무엇이 박사라는 직함에 맞는 연구과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예상이 완전하게 빗나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과녁을 잘못 보고 화살을 쏜 거라고요. 하하하. 아마 제 이야기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천재는 사람을 놀라게 만들죠. 쇼펜하우어가 말했잖아요. 천재는 보이지 않는 과녁을 쏘아서 정가운데 맞히는 사람이라고요. 말하자면 지금 제 눈앞에 과녁을 만들고 아무도 관심 없는 그 과녁과 저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중이라고요. 홍대리님은 이제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그래요? 저는 당연히 수백억 짜리 연구과제에 선정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엉뚱한 판단을 했군요. 그럼 말씀하신 중대한 프로젝트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과녁도 점점 궁금해지는 걸요? 오늘 제가 길박사님을 만나자고 한 이유는 사실 연구과제에 필요한 제안서 건이었는데…” (지가 천재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군요. 제안서 작성이라… 그런 건 매일 밥 먹고 하는 짓이라 딱히 노하우나 개념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데, 저한테 정보를 얻어 갈 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제안서 이야기는 나중에 제 연구실에 가서 나누기로 하시고 일단 제 말씀을 좀 들어봐 주세요. 의견도 좀 주시고요.”


“네… 일단 그래 보죠.”


“중대한 프로젝트는요. 홍대리님도 알다시피 제가 신촌의 소문난 미식남이 아닙니까? 이 신촌 근처의 맛집이라는 맛집은 제 입을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죠. 신촌에서 음식으로 장사를 하려면 제가 일종의 스탠더드가 아니겠습니까? 제 기호에 맞추지 못한 곳은 장사할 생각을 아예 접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까다롭고 철두철미한 음식에 대한 철학을 가진 제가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놓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제가 어쩌면 요식업에 종사하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일이 이 박사라는 학문적 성과에 이르는 데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취미적으로는 꽤 그럴싸한 일이 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혹시 언젠가 해변가 옆에 길박사 조개집을 차릴 수도 있는 노릇이고요.”


“이야기의 요지가 무엇인가요? 핵심이 없는 길로 자꾸만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요. 1막에서 권총을 보여주셨으면 이제 3막으로 넘어가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셔야죠. 일단 총을 쏴야 피하든지 맞고 쓰러지든지 할 거 아닙니까?” 내가 다소 짜증 나는 투로 말했다.


“하하하. 홍대리님 성격 급하시네요. 오늘 오후에 저 시간 많습니다. 홍대리님은 혹시 회사에 복귀하셔야 되나요? 음, 대리 신분이라면 시간적 제약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3막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아, 보드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홍대리님은 술 안 드시죠? 고량주 한 병 시켜도 될까요?”


“네 시키세요. (암요 암요 어차피 위대하신 길박사님이 계산하실 텐데요.)”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유튜브 시작한 거 모르셨죠?”라고 길박사가 말했다. 당연히 모른다. 그런 폭탄 터질 일을 내가 알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 유튜브를 하건, 야동을 찍건 관심 없다. 유튜브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나더러 장비 지원이라도 해달라고?


“제가 음식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재능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먹는 일이죠. 쩝쩝거리며 게걸스럽게 먹는 것에 관련해서는 저를 이길 사람이 없겠더라고요. 제가 면치기의 대가가 아닙니까. 저는 마이크가 없어도 입과 혀만 가지고 ASMR을 찍을 정도라니까요. 제가 쯔양과 비교해서도 뒤질만한 구석이 없더군요. 쯔양이 초밥 접시 100개를 먹었다고 하던데, 저도 그 정도의 양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 비교 우위성을 놓고 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요? 당연히 먹방을 시작했죠. 남몰래 말입니다. 시작한 지 넉 달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일주일에 적어도 두 편의 비디오를 올렸죠. 구독자가 꾸준히 오르더니 오늘 아침에 드디어 천 명을 넘어섰고 시청 시간도 4천 시간이 넘었더라고요. 광고를 올릴 수 있는 시점이 된 거죠.”


“아, 길박사님이 말씀하신 중대한 프로젝트란 것이 유튜브 구독자 천 명과 시청 시간 4,000시간 돌파로군요. 와, 이거 축하드립니다.”라고 나는 마치 대본에 적힌 대사를 무색무취의 음성으로 그러니까 초보 연기자가 발연기하듯이 말했다.


그래,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었다. 길박사는 박사로서 미래도 촉망되고 유튜브 먹방러로서도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는 골방에 처박혀서 코드나 주물러대다가 제안서를 쓰게 됐는데, 그는 옆걸음질을 치다가 먹방러로서도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다니. 난 어느 곳으로 가야 하려나.


그의 성공 가도를 물론 축하해 줬다. 물론 진심은 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엔 질투나 시샘을 담지 않았다. 그거 꽤 힘들었다. 왠지 점점 조급해지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연구실에 돌아가 신나는 감정에 흠뻑 취해있는 그를 유혹해서 제안서 뭉치라도 하나 뺏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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