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개발자의 독립 일대기
숨 막히는 짜장면 파티가 종료된 후, 우린 길박사의 연구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길박사는 자신의 연구실도 구경하고 나교수와 잠시 인사라도 나누며 안면이라도 트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흠,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어색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는 게 딱 질색이지만, 어쩌면 나교수에게 나의 존재감을 한 번쯤 드러내는 것이 굳이 나쁜 생각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상황을 급선회하기로 했다.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아무로 모를 일이 아닌가. 나교수는 길박사보다 제안서에 관련해서는 더 전문가일 테니까. 이런 게 영업이려나?
연구실이 위치한 대학원 건물을 향해가는 길, 교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진입하는 데,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나와 그들의 겉 표정은 비슷해 보여도 마음 속의 결이 다르듯, 우린 각자 다른 모양의 운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리라. 하지만 문제는 내가 가진 운명엔 이렇다 할 특징적인 게 존재하지 않는다. 각별한 냄새도 소리도 없었다.
교내 어느 먼 곳에선, 마치 군대 연병장에서나 들릴 법한 그런 촌스러운 라데츠키 행진곡 같은 게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분위기와는 달리 그다지 기분이 고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걷다 보니 대학원 건물 앞에 다다랐다. 연구실이 3층이라 충분히 계단을 이용할만했지만,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라면 딱 질색이라는 길박사의 주장 덕분에 엘리베이터에 무임승차하게 됐다. 물론 엘리베이터 타는 게 코인 노래방처럼 동전을 넣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세상 어느 곳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언제 희귀한 물건이 될지도 모를, 내 소중한 동전 하나를 바친단 말인가.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만.
길박사는 오름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4층에서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마치 세상의 모든 시계가 동시에 숨이라도 멎은 것처럼 분위기가 어느 순간 급속하게 냉각되는 것이었다. 나도 길박사도 어떤 공통적인 화젯거리라고 여길 만한 대화의 요소가 바닥나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딱히 아무 얘기나 꺼내서 그 어색한 분위기를 종결시키고 싶지도 않았으니, 나는 머릿속으로 빨리 제안서 샘플을 하나 낚아채고 집이든 사무실이든 복귀할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머리 위에 숫자 1이 찍혔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이었다. 우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마치 지하철 플랫폼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으로 뛰어들기 위해 핸드백을 투척하는 아줌마처럼 대기 자세를 취했다. 그만큼 우린 엘리베이터 승차에도 진심인 셈이었다. 길박사는 짜장면에도 진심이고 유튜브 먹방에도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제안서 쓰기에도 진심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상황이 꽤 긍정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이 전두엽을 부드럽게 쓸고 스쳐갔다.
문이 열리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안쪽에서, 마치 볼륨을 서서히 키우듯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주 유쾌하고 흥에 겨운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즐거운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석연찮음 같은 분위기가 서려있었달까. 그럼에도 나는 그 안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소리란 것은 어디에서나 예기치 않게 흘러들어오는 것이고 그 주파수의 성질도 사람마다 꽤 비슷한 것으로 해석되는 편이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테다.
그런데 나는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귀에 익은 분위기에 담긴 불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김대리와 나교수가 화창한 봄날에 즐거운 피크닉이라도 다녀올 사람처럼, 말하자면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처럼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내 목소리와 표정에 김대리가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마치 바이어와 중요한 약속이라도 맺은 사람처럼 나교수와 함께 나와 길박사 사이를 통과해갔다.
물론, 나 교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잠시 회의 석상에서 명함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그는 유명 인사고 나는 그렇지 않다. 나와 같은 평범한 부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생존하지 못한다. 그런데 김대리까지 내 존재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교수가 잠시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위에서 아래까지 스캔하듯이 훑어보긴 했지만, 그것은 화성에 살지도 모를 그런 하찮은 미생물 따위를 바라다보는 시선과 비슷했달까.
내가 갸우뚱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돌리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길박사가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아 맞다. 김대리님이랑은 회사 동료죠? 아 맞다 두 사람이 같은 회사였어.” 길박사는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며 범죄 현장 앞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말했다.
김대리가 왜 나교수랑 어깨동무를 하며 내려오는 것일까. 버그 처리하느라 바쁘다던 김대리가 왜 이곳 신촌에, 또 길박사 연구실에 앞에서 싱글벙글할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방금 목격한 존재는 김대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김대리와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인간의 한 유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미심쩍었다. 김대리가 아닌 또 다른 김대리일 거라는 가정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김대리가 나교수와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뒤통수를 향해 슬쩍 김대리에게 메시지를 던져봤다. “무슨 일이야? 나교수 연구실엔?”이라고 보냈으나 숫자 1은 오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더 불길해졌다. 뭔가 나쁜 정황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게 분명했지만, 난 그 기분 나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 그렇고 보니 홍대리님도 김대리님도 왜 그렇게 제안서 가지고 난리인 거예요?”라고 길박사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제안서 가지고 난리라니요?” 나는 웬 꿀단지에서 남몰래 꿀이라도 퍼먹어 대는 곰 같은 소리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이해할 수 없다는 눈매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에 김대리님이 여기 연구소를 찾아온 거예요. 나도 아니고 다짜고짜 나교수를 찾아왔더라고요. 근데 김대리 손에, 나교수가 좋아하는 밸런타인 17년산이 들려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단단한 궁리를 갖고 청탁이라도 하려고 온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아무리 눈치가 없는 얼간이라도 그 정도는 다 알잖아요.” 황당하다며 이제서야 내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이해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길박사가 말했다.
점점 더 어이가 없어졌다. 뭔가 수상한 쪽으로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뭔가 공작이 시작되고 있는, 아니 한참 진행 중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은밀히 돌아가는 중이라지만, 이것은 바로 내 칸막이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펼치는 일이 아닌가.
“일단 연구실에 가시죠” 길박사가 황당한 내 표정에 담긴 뜻을 납득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말했다.
우린 길박사의 연구실로 돌아가, 진한 커피 믹스를 한 잔씩 타놓고 자초지종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놓인 상황은 명확했다. 나는 지금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위기가 아닐지라도 나는 현 상황을 위기에 준하는 급으로 산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위기에 발휘해야 할 중대한 프로세스를 긴급 발동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위기를 예측한 적도, 위기에 반응하기 적당할 만한 매뉴얼 따위를 설계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현재를 단순한 위기 상태로 격상시킬 뿐, 어떤 근본적인 대책도 임시 해결책도 없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식만 할 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뿐인데, 요즘은 나 자조차 통제하기가 더 버거워졌다. 내가 나지만 때로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때로는 내가 김대리인지 홍대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나는 마치 기획능력을 영영 상실해버린 기획자가 된 기분이며 하루에 담배 세 곽을 피지만 담배 피우는 습관을 잃어버린 얼간이 골초가 된 것 같았다. 물론 담배를 피워본 적도 기획 일을 경험해 본 적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 자신을 잃은, 말하자면 등 껍데기를 잃어버린 소라게가 된 것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시콜콜한 일들을 김대리와 자주 상의하는 편이었다. 김대리는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내가 늘어놓는 온갖 푸념과,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들을 끝까지 들어주고 때로는 냉철한 조언까지 아끼지 않았다. 얼마나 귀가 따가웠을까.
지난달에는 연구소 팀원이 모두 모인 회의 석상에서 즉흥적인 프로세스로 결정되는 보고체계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표에게 한마디를 던졌다가, 공개적인 비난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김대리가 자청하여 술 한 잔을 사주면서 위로해 준 적까지 있었다.
물론 오늘 길박사 연구실 앞에서 김대리가 나교수와 같이 어울린 상황을 목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김대리와 내가 그동안 쌓은 신뢰의 성을 허물어뜨릴 가설까지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정황적인 증거들뿐이았다. 물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김대리가 나교수가 굉장히 친밀한 관계가 됐다는 거 자체 외에는 드러난 진상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길박사는 내 머그잔에 커피 믹스를 두 개나 투입했다며, 그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홍대리님! 제가 커피 믹스를 두 개나 넣었다니까요. 그거 두 개 넣으면 거의 아인슈페너 급으로 달달해지는 거 아시죠? 아까부터 홍대리님 표정이 어둡길래, 제가 특별히 홍대리님을 위해서 준비했다니까요. 얼음도 세 개 동동 띄워놨으니 시원하게 드세요.”
나는 고맙다는 말도, 그렇다고 싫다는 표정도 아닌 다소 밋밋한 표정으로 입가를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고개를 추켜세우는 일도, 미소를 보여주기 위해 입술 양쪽에 힘을 가하는 작용도 모두 성가셨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몸의 일부분을, 아니 몸 전체와 정신을 온전히 통제하기 점점 곤란해져간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국면을 전환시키기는 힘들지라도, 할 줄 아는 게 사실 직관뿐이지만 그럼에도 심경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서 급격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 사람처럼 나에게는 그런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혼란스러움이 사라지고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설탕이 두 배로 담긴 커피 믹스 때문이었을지도.
길박사와 나는 커피 맛의 순수성에 대해서 잠시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직진할 수 있도록 핸들을 전환했다. 그리곤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이므로 마치 오토 드라이빙 모드로 설정하듯 마음을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고정시켰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제안서 말씀인데요. 제가 사실 일주일 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맞게 됐어요. 그게 바로 식사하면서 잠시 말씀드렸던 제안서 건이에요.”
“아, 그렇군요. 제안서, 그렇죠 맞아요 홍대리님이 제안서 쓰기에 대해 말씀하셨죠? 아,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제가 오늘 아침에 유튜브 구독자 천 명 됐다고는 말씀드렸었나요? 요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하하하. 단 몇 시간 전에 한 이야기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해서 말이에요. 병원에 가서 치매 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는 건지, 아직 30대 중반인데, 그런 일은 설마 없겠죠? 아무튼 유튜브 구독자 천 명 만들기 프로젝트 정말 어려웠다니까요. 매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어렵지 않은데, 댓글에 하도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많아서…” 길박사가 내 일에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자신의 일엔 분량을 길게 확보해 놓았다.
길박사는 내가 제안서 이야기를 언급하기 무섭게 곧바로 일부러 기획이라도 한 것처럼 확신을 갖고 화제를 유튜브 쪽으로 돌려버렸다. 말하자면 그가 키를 움켜쥐고 있었으니, 그가 가진 악력을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향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분위기를 교묘하게 제안서 쪽으로 옮겨볼 방안은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럴만한 말재주가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길박사가 제안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의 우스꽝스럽고 유쾌하던 표정을 얼굴에서 말끔하게 덜어내버린 것이다.
“제안서 업무를 맡으셨다 이거죠? 그런데 제안서는 써본 적이 혹시 있으신가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길박사가 물었다.
“처음이죠. 완벽한 처음입니다. 저는 쓰는 것과 관련해서는 거의 CPU와 RAM이 없는 노트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고백하듯이 길박사에게 말했다.
“깡통 노트북이라면 뭐 그래도 가능성 1% 정도는 있겠네요. 그저 부품을 하나씩 채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거기다가 어떤 브랜드, 혹은 어떤 프로그램을 채워야 할지 그게 문제겠군요. 그래요 홍대리님을 슈퍼스타 K 예선에 처음 나온 아마추어 가수라고 가정해두죠. 그렇게 캐릭터를 설정하고 한 번 가봅시다.”
“제가 슈퍼스타 K에 진출한 가수 지망생이라고요? 저는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네, 저도 농담에 농담으로 화답했을 뿐이랍니다.” 내가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안서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템이 중요합니다. 아이템은 선정이 됐나요?”
“아이템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여기 제안 요청서를 보시면…” 나는 노트북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 뭉치를 꺼냈다. 노트북 가방 안에는 노트북이 없다. 붕어빵 안에 붕어빵이 없고 국화빵 안에 국화가 없듯이. 내 노트북 가방 안에는 종이 뭉치만 한 가득이었다.
한동안 제안 요청서 뭉치를 심각하게 관찰하던 길박사가 침묵을 깨더니 비로소 말이란 것을 꺼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