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09. 2020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일간 공심 중에서

팩션


이 이야기는 팩션을 기반으로 했습니다.(실제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되 허구의 요소를 도입한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


그녀와의 첫 인연은 대학 종교 동아리에서 시작됐다.


“오후 수업 끝나고 혹시 어디 가니?”

“어? 그건 아닌데, 무슨 일 있어?”

“잘 됐다. 그럼 이따가 수업 끝나고 봐”


취미라곤 공부뿐인, 절대 인싸인 그녀가 왜 나에게 보자는 말을 건넸을까?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난 원래 수업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더 심하게 마음이 딴 곳으로 흘렀다. 디지털 논리 회로는 무엇인가. 신호가 아래에서 위쪽으로 물결을 그린다는데, 내 마음이야말로 양자 파동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불쑥 나타났다. 같이 가볼 때가 있다고. 나는 따라가자는 말에 말없이 그녀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췄다. 설마 장기 떼어가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그런 의심은 버린 채. 그녀는 동아리들이 운집한 학생회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언제 동아리 활동이라도 했었나? 의문에 또 다른 의문이 가속됐다.


나는 속으로 의심과 기대를 동시에 품었다. 설마 '신천지'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평소 그녀는 ‘그리운 금강산’을 장기 자랑 때마다, 메조소프라노로 불러 젖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설마 그런 사람이 사이비에 물들었겠어? 그럼 평상시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사람이 왜 나에게 동아리방으로 같이 가자는 걸까?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할수록 더 이상한 생각만 보태질 뿐이었다.


나를 데리고 그녀가 향한 곳은 기독교 동아리방이었다. 어라? 나 교회 다닌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여긴 왜 데리고 왔을까? 뭔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봤구나,라는 생각과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곳을 얘기도 없이 데려와? 이런 두 가지 생각이 작은 분노와 호기심을 작용시켰다. 대학교 생활을 지속한 이후로 동아리 활동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몇 개월 뒤면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올 것이 뻔한데, 인간관계든 취미활동이든 전역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총신대에서 파견 나온 간사님 한 분과 순진하게 생긴 기계공학과 선배 한 명, 그리고 이곳까지 나를 끌고 온 S, 3명과 한 공간에서 모임을 열게 됐다. 참으로 뻘쭘하고 어색했다. 왕년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마음속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영접하기엔 그릇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굳이 나를 종교인이라고 소개하기가 좀 그랬다. 작은방에 원을 그리고 둘러앉아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늘 하게 되는 자기소개란 걸 하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숫기가 없는 시절인지라, 나는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는데, 되게 바보 같았던 것 같다. 전산과 재학 중인 이석현이라고 합니다.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기독 동아리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못했다. 승인을 받으려면 채워야 할 최소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중용되었을 것이라 지금은 생각해 본다. 아무튼 그때는 숫자라는 의미보다 많은 사람 중에서 그녀가 나를 콕 찍었다는 게 더 의미 있었으니까. 다른 관점은 내 마음에 개입하지 못했다.


종교 동아리의 이름은 J**였다. 뜻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가 아니라는 것이 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임은 참 이상한 곳이었다. 새벽마다 같이 기도 모임을 갖는 것이나, ‘많은 물소리’라는 신기한 이름을 가진 복음 성가집의 노래를 배우는 것도, 모임 후, 같이 어딘가로 다니는 일도 신기했다.


어쩌면 난 그때 꽤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외로움을 파고든 그녀의 제안이 종교적인 형태든 그렇지 않든, 그 무엇이든 내 외로움을 덜어내는데 큰 힘을 냈으니까. 12월쯤이었을까? 그녀는 다가오는 토요일 오전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약속 장소는 우이동이라고 말했다. 우이동으로 아침 일찍 모이자, 몸매가 통통한 간사님이 함박웃음으로 우릴 맞았다. 참으로 순수하고 정직하고 신앙밖에 모르지만 농담을 기막히게 구사하는 간사님이 우리를 반겼다. 간사님을 비롯하여 동아리의 일원들이 모두 모이자, 간사님은 우리의 목적지는 백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운대라면 도봉산 꼭대기가 아닌가? 게다가 오늘은 눈까지 소복이 쌓였는데? 난 또 구두까지 신고 나왔는데, 이런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 간사님은 참으로 따뜻했지만 그날은 쌓인 하얀 눈 덩어리처럼 매정했다. 요즘 말로 단호박이라고 하면 딱 맞겠다.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심지어는 등산 복장도 아닌 상태에서 백운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 오늘 인생 하직하는 날이구나. 난 무슨 산과 원수가 졌기에 눈 오는 날마다 산에 올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퍼부어졌다. 어릴 적 아버지와 남한산성에 오르다, 눈 비탈길에서 미끄러진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날 발이 정말 고생스럽게 싸움을 펼쳤다. 아마도 몇 백 번을 미끄러졌던 것 같다. 그래도 좋았단 것은 나만 바보같이 자빠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처럼 바보가 되었다는 사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S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S는 앞으로 넘어지지도 했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나는 사심 가득한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사심으로 가득한 나의 마음도 일순간 마치 동지를 배려하는 듯한 기분으로 바뀌었으니까. 역시 종교의 힘은 사람의 욕망을 잠재운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어쨌든 우린 형제자매의 우애를 과시한 끝에 백운대 정상에 올랐다. 바위 꼭대기에 위태롭게 올라 서울시 전체를 조망하며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낙관적일까? 비관적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주고받았다.


내려오는 길에도 우린 많이도 넘어졌다. 쌀자루를 챙겨온 간사님 덕택에 눈썰매를 타기도 했다. 간사님은 참 멀리 보는 사람인가 보다. 도봉산에서 눈썰매를 탈 생각을 했다니... 우린 어른이었지만 소년이자 소녀처럼 뛰어다녔고 미끄러졌고 웃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우린 살아남았네?,라는 작은 탄성을 각자 질렀다. 12월, 눈이 한가득한 백운대를 정복했는데 무엇이든 못하겠느냐,라는 자신감도 함께 메아리로 보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속으로 나는 S를 더 좋아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신조가 나에겐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절대 들키지 말자는 것. 그래야 짝사랑이 아름다운 순간으로 빛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지론 말이다. S를 비롯하여 간사님과도 많이 친해졌다. 고생이란 걸 같이 교환하면 사람은 더 친해지나 보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 덕분이었을까. 그녀에게 일부러 과한 농담을 해대는 내 마음을 그녀는 알았을까. 살짝 찡그리며 웃는 그녀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12월이 되면 나는 백운대가 가끔 떠오른다.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긴 그녀도 생각난다. 그날 우린 참 바보같이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녀는 설마 지금도 넘어지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우린 아마도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S의 손을 처음(?) 잡은 이후 나는 그 애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겉으론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이처럼 행세를 했다. 간사님을 비롯한 동아리 식구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남을 가졌다. 백운대를 함께 정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치환 콘서트에서 서울대공원 현대미술관까지 우린 여기저기를 배회하고 다녔다. 당시 나에겐 공식적인 여자친구가 없었으므로 미술관이나 콘서트에 남자뿐인 무리와 함께 다닌다는 게 좀 이상했다. 그럼에도 그 모임은 언제나 편안했고 반가웠다.


간사님은 기계공학과 선배나 나를 보면 언제나 칙칙하다고 같이 놀지 말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때론 그녀 없이 남자들끼리 만나도 간사님의 널찍한 뱃살만큼 기분은 참 넉넉했더랬다. 난 간사님이 친형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말 매일 보는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함께해서 더 좋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남의 동아리방에서 더부살이하는 시절도 끝을 내야 했다. 동아리가 정식으로 인가받으려면 10명 이상이 모여야 하는데, 우리는 학기가 지나가도록 사람 수를 맞추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모임을 갖지 못하게 됐다. 새벽마다 QT를 갖던 시간도, 복음성가 기타 코드를 주마다 두서너 개씩 외우던 시간도 마감을 가져야 했다.


마지막 모임이 열리던 날, 우리는 각자 선물 하나씩을 준비하기로 했다.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집에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걸 준비하기로 했다. 집안을 뒤져봐도 모두 고물들뿐이었다. 악몽을 꾸는 것도 아닌데 자다가도 번쩍 눈이 뜨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뭘 챙겨가는 게 좋을까. 차라리 새로운 물건을 사놓고 중고라고 속여야 할까. 마지막 날을 앞두고 머리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아끼는 물건이란 무엇일까. 불을 끄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다. 창밖엔 가을비가 서늘하게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분주하고 요란스러운 소리들을 하나씩 채로 툭툭 털어 내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골똘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이모가 물려준 오디오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LP가 있었어. 이모가 십수 년 전에 어렵게 얻어냈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있었지. 난 그 앨범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턴테이블에 평평하게 펴두었다. 그때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Mlq-hOIoc&t=1248s


“24살의 라흐마니노프가 첫 번째로 작곡한 교향곡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거야. 근데 그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나 봐. 혹평과 비난이 폭주한 거야. 근데 라흐마니노프가 심성이 되게 여린 거야.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어? 너무 상심한 나머지 몇 년 동안 작곡 활동부터 외부 활동까지 모두 끊었대. 지독한 우울증에 빠진 거야. 3년 동안 작곡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해가 가? 근데 그런 그가 3년 만에 짠하고 나타난 거야. 대중 앞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고 완벽한 공연을 펼친 거지. 근데 그 공연이 얼마나 멋졌냐 하면 그 곡 때문에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린 거야.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거야. 근데 그에게 더 드라마틱 한 이야기가 있는 거 알아? 그의 복귀를 위해 도와준 의사가 있었는데, 그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도록 옆에서 아버지처럼 도 왔나 봐. 오죽하면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그에게 헌정했겠어”


그러니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가 우울증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게 된 계기를 선물한 곡이었다. 나는 이모에게 선물 받은 LP로부터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를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가 쌓여 갈수록 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에게 위로를 받았다. 몇 십 번, 아니 몇 백 번을 미치도록 들었다. 그의 연주는 해일이 밀려오듯 거세게 몰아쳤고 때로는 가을비가 메마른 땅을 적시듯 촉촉했다. 하지만 그래, 이거야 이제 라흐마니노프를 떠나보낼 때가 된 거라고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던 날, 나는 누가 적임자가 될지는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선물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할 사람은 분명했다. 그녀는 언젠가 피아노 치는 게 취미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성악까지 취미인 사람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나는 선물 받을 사람을 일방적으로 염두에 두고 그 사람에게 선물이 돌아가도록 부비트랩을 설치한 셈이었으니까.


나의 의도대로 그녀는 내가 설치해둔 레이더 가시권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풍경은 그런대로 훈훈하게 흘러갔으나 그만 슬픈 드라마로 완결될 듯했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으나 모두가 예상한 대로 이야기는 그렇게 짝사랑으로 결말을 맞아야 했다. 얄궂게도 그녀에게 의도한 선물을 전달한 이후로, 나는 영장을 받았다. 입대를 일주일 앞두고 간사님과 기계공학과 선배는 춘천까지 쓸쓸한 여행길에 동참했다. 그녀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편지를 써 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것이 그녀에게 들은 마지막 음성이었을까?

이전 15화 계속해서 움직이고 나아가고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