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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02. 2020

계속해서 움직이고 나아가고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

일상에세이

날이 흐렸다. 날씨가 흐려지면 내 하루는 흐림의 폭만큼 혼탁한 것들이 자리를 가로챘다. 창가 앞에 차분하게 서서 바깥을 응시하고, 반가운 소식을 찾는 사람처럼 아침을 뒤적뒤적거렸다. 어제와 다른 아침이 시작됐으므로 나는 새로운 기대를 품고 싶었지만, 마음은 소심한 전개를 펼칠 작정이었다.


이유 없는 슬픔이 수런거렸고 대답하지 못한 나는 어둠 속으로 좌초하고 말았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불안함이 스미는 이유는 뭘까. 창가에 우두커니 보초처럼 서서, 어정거리는 바깥세상 사람들의 배회를 지켜보는 나는 관찰자가 되고 싶었을까, 방관자가 되고 싶었을까, 한낱 빛나려다 주저앉은 회색 먼지에 불과했을까. 내 신분을 규정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가끔은 목적 없이 한 곳에만 정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방향을 잃은 생각일랑 아득한 곳으로 떠나보내면 좋으련만.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포근한 기운이 잠재의식 속에서 뻐근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분명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침에 존재하지 않았고 찾아도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 생각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된 것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간헐적으로 나는 잊혔다. 내 영혼은 부스러졌고, 생기를 잃어갔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연계에서는 나를 되찾는다고 믿었다. 연두색이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면 나는 그들과 존재감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이 갈색의 감각들을 그들이 환원시켜줄 테니. 그러니까 물든다는 것은 나의 색깔을 그들이 포용해 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 작용이 나를 더 그들과 하나임을 인식시켜줄 테니. 나는 떠나련다. 그들과 함께라면 어디든.


그러니 끝없이 걸어야 한다고 확고한 다짐을 했다. 다짐이란 건 바깥에서만 통용된다. 어제는 온통 걸어야 한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11.6킬로미터의 거리를 지독하게 걸었으니 나는 자연과 조금 친밀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일관된 목적지를 향했으니 벤야민처럼 길을 헤매는 자는 되지 못했다. 그래,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두려움이 내 삶에 밀착하게 흡착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것과 이미 한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이런 생각은 이제 그만하는 편이 낫겠다. 이러다 두려움에게 잡아먹히고 말 테니.


두려움으로 포장된 도시의 인공물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콘크리트로 도배된 불규칙한 질서들, 제각각 다른 크기를 자랑하는 간판 속의 글자들, 무겁게 구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들, 공적 마스크 판매 중이라는 약국의 외벽 종이 한 장, 밀물과 썰물 같은 지하철 입구의 사람들. 문득 어떤 풍경이든 사유할 수 있다면, 내 감각이 자연계에 흡수된 순간처럼 나는 그들과 같은 동질성을 얻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없었다. 가끔 사유의 끝에서 실체를 드러내긴 했지만.


걷는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미약하게나마 터득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나아가고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 그러니까 보폭 하나에 내 삶에 산소 같은 희망들이 보태어진다는 것, 그래 나는 어쨌든 매일 변해가고 있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는 변해가는 수단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달라질 때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생각보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 그런 깨달음은 걸음을 보태듯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심장에 더 찬란하게 각인된다는 사실.


셀 수 없는 발걸음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하루를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지 못했다. 하루는 나의 판단으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심도가 깊었으니까. 다만 남은 것은 여백이었다. 걷는 순간만큼은 내 생각에게도 여백이 공간을 차지했을 테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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