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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22. 2020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

카드 한 장?

신용카드 한 장. 이 납작하고도 손바닥 한 장에 쏙 감춰지는 카드 한 장이 내 일상을 흔들고 다닌다. 얼마 전부터 나는 아예 지갑과 카드를 떼어 놓았다. 물론 버려진 그 지갑도 사실 부피를 줄인 것이지만, 이젠 아예 지갑 자체의 쓸모도 무용해지고 말았다. 이젠 신용카드 한 장만 달랑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가볍고 얇은 카드 한 장이라면 그 무엇이든 허용되는 세상에서 나는 거주 중이니까.


카드는 추상화된 세상을 단순하게 정돈한다. 세상을 납작하게 압축시켜 버리더니 하나의 개념으로 일반화시켜 버린다. 카드 한 장이라면 나는 어떤 곳에서든 자유를 누린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타락을 선택할 수 있었고 죄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죄를 벗어버릴 해방의 의지도 지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유는 예속의 괴로움, 탈피의 기쁨을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그토록 갈구한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자유의지 때문에. 카드가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줬다. 역시 인간은 속박을 경험해야 자유를 알게 되나 보다. 신용카드가 자유를 깨닫게 해 주다니.


이제 무거운 짐일랑 모두 던져버리고 가벼움을 덤으로 얻는 것이다. 내가 카드일까, 카드가 나일까, 나는 결제되는 인간으로, 단순화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존재의 의미가 서로 섞이면 어떠랴. 카드는 전면에 나서서 나를 대표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며 세상과 나 사이를 번역하는 매개체로써 활약할 텐데.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나는 얇지만 응축된 세상으로 종속되어 간다. 카드 없이 단 한순간도 버틸 수가 없다. 오백 원하는 편의점 봉지 라면조차 카드 없이는 내 삶에 편입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카드는 꽤 무겁다.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카드 한 장이 전하는 무게는 내 인생의 남은 나날처럼 묵직하기만 하다.


나는 종이로 만든 지폐라는 것을 얼마 전까지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가벼운 것은 카드와 어느 순간 비교되기 시작했다. 지폐는 카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카드는 단 한 장으로 지폐 수백 장, 아니 수천 장의 역할을 능히 해냈기 때문에.



나는 퇴근하는 길에 가끔 노정상 주변을 스쳐갔다. 길거리에 빼곡히 들어선 노점,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에 때로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 물건들은 카드에게 늘 불친절했다. 나는 현 실태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보잘것없는 카드를 들이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폐는 소지하지 않았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했고 어딘지 모르게 흘릴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게 만들었으니까. 그렇다, 지폐는 늘 그 모양이었다. 요즘처럼 장마철이면 습기에 축 늘어졌고 쓸모없는 모양으로 변질됐다. 그럴 때마다 카드는 당당했다. 그 어떠한 상황이라도 견딜 것처럼 굳건했다.


카드는 어느 날부터 나를 계급화시켰다.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나에게 등급 표가 매겨진 것이다. 나는 그 등급을 보고 가끔 대견하다고도 그리고 우쭐해지기도 했다. 난 신인류라도 된 걸까? 난 어쩌면 더 나 다워지는 방법이라도 익힌 걸까. 가벼운 카드 한 장이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심지어는 내가 누구인지 더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간편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난 혜택을 입은 거다. 변화와 혁신에 대비해야 한다. 생존하려면.


난 누구든 연동이 되는 존재다. 카드는 어디든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니까 나는 비서에게 세심하게 관리되는 거다. 네트워크를 타고 어쩌면 네트워크 자체가 되어서, 나는 스스로 통제당하는 걸 즐기고 내 동선은 미리 계획된 대로 아니 인공지능이 예비한 대로 성실하게 움직인다. 나는 그럴 때마다 포근하고 안전하고 평화롭다.


어쩌면 우린 신인류로 살아가는 혜택을 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계속적으로 틀을 새롭게 구축해 나간다. 물론 틀 안에 거주하면 그만큼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된다. 그것이 나를 제한하는 길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린 시스템에 길들여져 간다. 그리고 잊힌다. 나는 네트워크 속으로, 카드 한 장에 삽입된 그러니까 아주 작은 칩에 새겨진 채로. 곧 완벽한 줄이 그어진다. 미세한 줄, 가로로 세로로 어긋나기만 하는, 선과 선의 얽힘 속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나의 정체성, 나는 어디에 있는가. 카드는 수단인가, 일부인가, 전부인가. 카드에게 물어보라. 모든 정보는 카드에 담겨 있으니까. 믿음이 부족한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아이핀, 공인인증서를 추천한다. 물론 카드 한 장만 가지고 다닌다는 개념은 변함없다. 저것들은 모두 추상화된 녀석들이니까. 바둑으로 치면 덤에 불과하니까. 전 세계에 널리 통용되는, 나라와 나라를 묶는, 사람들 간의 거리를 좁히는 문명의 이기들이니까. 편리함이라 부르는 어떤 신무기 같은 것들.


접착제로 때워진 내 카드 지갑


어젯밤엔 카드 지갑을 오랜만에 서랍에서 꺼냈다. 쓰지도 않았는데 실밥이 한쪽 구석에서 바깥으로 너털대고 있었다. 카드 한 장만 들어가면 충분한 녀석이 뭔 불만이 그리 많다고 입을 삐죽이 내밀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고민했다. 어차피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한데, 굳이 녀석의 원성을 해결해 줄 필요가 있을지 몰랐다. 쓸데없는 녀석,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은 그럼에도 내 보살핌을 기다렸다. 나는 오래된 본드, 프라모델용으로 제작된 접착제를 서랍에서 덜컹거리며 겨우 꺼내 들곤 녀석의 투덜거림을 잠재웠다. 녀석의 이야기를, 이십 년은 묵었을지도 모를 수다 따위를 오래도록 듣다, 나는 왼손으로 카드 한 장을 들었다. 하지만 오른손에 든 카드 지갑이 무거운지, 왼손에 든 카드가 무거운지 개량할 수 없었다.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 인간의 손이 저지른 판단들이 아닌가. 자의와 타의에게 순응하는 나는 순한 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물건들에게 혹시 대체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내가 카드가 아니라 분명하게 발언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완벽한 독립체로서 4차 산업 혁명 시대에서도 여전히 실존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이 가볍고 묵직한 카드 한 장을 내 몸에서 떼어내고도 나라고 증언할 수 있을까. 아, 안 될 것 같다. 나는 이 부차적인 것들에 너무나 길들여졌기에, 내가 아님에도, 나를 나답게 만든다고 맹신하는, 그러니까 내가 아닌 가치가 나를 대표한다고 믿는,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것에 너무나 중독된 나이기에. 그래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하다. 단 한 장이라면 내가 살아가는 데 전혀 문제없다. 자유로운 세상! 나는 카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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