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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Aug 26. 2020

담을 넘는 법을 가르쳐준 아이

우리는 오늘도 담을 넘는다

친구 손씨와 내가 알고 지낸 햇수가 10년이 훌쩍 넘었다.  

손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에야 떼어 놀래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친하게 지내지만, 솔직히 손의 첫인상은 좋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11년 전의 3월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입학 첫날부터 교실 뒤편에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것이 꽤나 꼴불견이었다. 그리고 손은 그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있었다. 새 교복을 입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킷 대신 패딩을 걸쳐 입는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튼, 손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손이 자신을 잘생기게 그려달라고 수차례 부탁하여, 최선을 다했다.



 

자습시간이면 손과 몇 친구들은 자꾸 어딘가로 사라졌다.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동네에서 엄하기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동네에서 유일하게 밤 12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시켰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규정이지만, 그 엄한 규정 때문에 먼 동네에서 모교로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행여 학생들이 도망칠까 복도와 교문 앞에서 지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과 친구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약 올리듯, 자꾸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 손과 친구들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궁금해졌다.  하루는 손이 자습실을 조용히 나갈 때, 속으로 서른까지 세고 조용히 복도에 나가 창밖으로 그들을 내다보았다.  그러면 별안간 복도 밖 운동장에 보이던 녀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땅으로 꺼지지도 않고, 하늘로 솟지도 않고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을 비비고 운동장 구석구석 쓱 훑어보았지만, 역시 그들은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이후로 손과 친구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꼭 알아내고 싶었나 보다.  나는 며칠 동안 그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고 나니 그들 말고, 감독 선생님들의 습관도 알게 되었다. 월요일에는 쉬는 시간마저 숨이 턱 막히는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다.  수요일에는 담임 선생님이 오셨으니, 도망갈 꿈조차 꿀 수 없다.  그런데 화요일 목요일에는 엄마처럼 푸근한 인상의 외부 선생님이 오셨다.  학교 선생님은 아니고, 아르바이트처럼 자습 시간에만 오셨던 그 선생님은,  희한하게도 1교시만 끝나면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았다.  손과 친구들은 언제나 이 선생님이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고서도 몇 분이 지난 후. 그때가 사라질 타이밍이었다. 도저히 깰 기미가 안 보이는 감독 선생님 머리 위로 팔을 휘휘 저어, 그녀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면 손 일행은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갔다.  여기까지가 내가 며칠 동안 관찰한 바였다.


그런데 그 날은 무엇이 씐 것이 분명했다.  그 이후가 궁금했다. 운동장에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말이다. 평소 같으면 서른까지 속으로 셀 것을, 채 열도 쉬지 않고 따라나섰다.  잰걸음으로 일층에 다다랐는데, 손과 친구들은 이미 증발한 후였다.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안도와 오늘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던 때, 나지막이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왜 따라와!"

건물 입구 오른쪽 한 구석에서 손이 속삭이듯 소리쳤다.  손의 친구들은 온데간데없고, 그만 덩그러니 남아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 할 즘에 손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너도 갈 거야? 그럼 이리 와."

손은 자습실 건물을 끼고 휙 돌았다. 건물과 담벼락 사이의 좁은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꽤나 낮은 담이 있었다.  담을 넘고 있었구나.  손과 친구들이 사라졌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담의 낮은 부분은,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는지 붉은 벽돌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시멘트 속살을 훤히 보이고 있었다.  개교 이래,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이 담을 거쳐갔으리라.  책상머리에 앉아한 글자를 더 읽는 것 대신, 학창 시절의 추억을 위해 이 비밀 같은 공간을 지나쳤으리라.

 

손은  익숙하게 담벼락을 짚고, 작은 몸을 들어 올려 순식간에 담을 넘어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으니, 담 건너편에서 손의 다그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 갈 거야? 말 거야?"

 당연히 안 가는 것이 정상 아닌가.  나는 대답 대신 수많은 학생들의 흔적이 묻어 있는 담벼락을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손은 담벼락 건너편에서 까치발을 들어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알겠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능숙하게 담을 넘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친히 나에게 담 넘는 법을 알려 줬다.


"자, 양손으로 끝을 잡고, 몸을 밀어 올려서 넘어.
이 쪽 담이 낮으니까 여기를 잡아."
 


담을 넘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손을 쭉 뻗어 담을 짚었는데, 보기와 달리 꽤 높았다. 내가 두 손으로 담을 짚고만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손은 그런 나를 골똘히 보더니 바로 옆 화단에서 짱돌을 하나 주어왔다. 그러고는 그 돌을 내 발 옆에 턱 하고 놓더니 더 적극적으로 담을 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아무래도 손은 나를 오늘 꼭 담을 넘게 할 십상이다.

얼떨결에 나는 손의 지시대로 짱돌을 딛고 올라가 낑낑 대며 담을 넘었다. 짱돌을 딛었어도 담은 나에게 꽤나 높았기에, 내려오면서 거친 시멘트에 살이 그대로 까졌다.  하지만 상처는 그리 쓰라리지 않았다. 나 자신이 더 신기했다. 담을 넘었다. 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손은 나를 먼저 담 너머로 보낸 후, 아무렇지 않게 휙 하고 넘어왔다.  담 넘는 법을 가르쳐줬으니 고맙다고 라도 해야 하나 하던 차에, 손은 늦었다는 듯이 부랴부랴 그 앞 도로를 뛰어갔다. 증발의 비밀을 알고 나니, 그가 어딜 그리 급히 가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피시방 아니면 노래방일 것이라 확신했다.

담을 넘었다는 짧은 뿌듯함도 잠시, 정신 차리고 보니 학교 교문 밖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야겠다고 잠시 골똘히 생각했는데, 혼자서 담을 넘는 것은 무리였다.  담을 잡고 몇 번 낑낑대보니, 짱돌도 손도 없이 내가 넘을 수 있는 높이의 것이 아니었다. 교문으로 당당하게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참 난처했다.   교문과 담벼락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나는 그냥 집으로 향했다.  내 첫 일탈이자, 처음으로 자습을 짼(?) 날이 되었다. 다음 날 가방 없이 등교하는 것이 얼마나 머쓱했는지 모르겠다.





그 날 이후 손과 나는 부쩍 친해졌다. 손은 말투와 달리 꽤나 섬세한 친구였다. 누나가 있다고 하더니 그 덕인 것 같았다. 손은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픈 나를 항상 놀렸지만, 대부분의 행동에서 나를 배려해 주었다.  

 예를 들면, 손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담을 넘는 법을 가르쳐준 그날처럼 말이다.  같은 동네에 십 년 가까이 살면서도 몰랐던 분식집이라던가, 그곳에서 나오는 떡볶이를 제대로 먹는 법 같은 것들 말이다.  손은 삶은 계란을 으깨서 떡볶이 국물에 살살 비벼 먹었는데, 그 방법이 어찌나 맛있던지 부모님을 모시고 그 분식집을 간 적도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손은, 언제나 내 MP3에 본인 취향의 노래를 가득 담아 주었다.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아이돌 팬 시늉을 하고 있던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선물이었다.  가끔은 귀가 쨍할 정도로 강렬한 헤비메탈도 한 곡씩 들어있었지만, 대체로 가사가 와 닿는 인디밴드들의 노래었다.  MP3에 담긴 리스트들이 질려 새 노래를 담아 달라 조를 때쯤이면, 손은 혼자 노래 못 다운로드하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절대 예쁜 말로 바로 해주는 법은 없었지만, 다음날이면 또 새로운 노래들로 MP3가 가득 차 있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던, 고등학생 나에게 손은 언제나 기분 전환의 대상이었다.  모의고사 시험지를 붙잡고 우울해하는 날이면, 손은 '맛있는 것 먹고 오자' 하고 꼬드기곤 했다.  그러면 우린 매번 건물 오른쪽 작은 비밀통로를 지나 담벼락 밑에 도착해 있었다.  어찌나 자주 넘었는지, 언제부턴가 짱돌 대신 튼튼한 나무 박스를 구비해두기까지 했다. 여전히 매번 담을 넘을 때마다, 다리에 상처 하나씩은 났지만 이제는 손 없이도 혼자 담을 넘을 만큼 실력이 향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담 밑에 설 때마다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괜찮을까?'라고 내가 질문하면, 손은 언제나 '그래도 돼.'라고 단언했다.  손의 대답은 중의적이었다. 담을 넘어도 괜찮다는 뜻이자, 나를 괴롭히는 쓸데없는 고민들을 잠시 잊어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우리가 매번 담을 넘더라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하루는 담을 넘자마자 생물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선생님은 다 이해한다는 듯 빨리 가라고 손짓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후다닥 길을 건너며 중얼거렸다.

"생물..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


학년이 올라가고부터는 우리는 더 이상 담을 넘지 못했다.  시멘트 속살 훤히 보이는 낮은 담벼락 위로, 아주 높은 펜스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교생과 선생님들까지 다 아는 비밀 통로였으니,  언제라도 안 막는 것이 이상한 일이긴 했다.  다만, 우리의 선배들은 3년 내내 이 비밀통로를 애용했을 텐데.  얼핏 봐도 수십 년 동안 넘나든 것 같아 보였던 담벼락을, 왜 우리가 입학하고 나서야 부랴 부랴 막아야 했을까.  

"사실 생물이 일렀을지 몰라.  나쁜 사람."

애꿎은 생물쌤에게만 화살이 튄다. 손과 나는 화단의 은행나무만큼 높은 펜스를 보며 얘기하다 결국 다시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손과 나는 곧 새로운 담을 찾았다.  참 희한하게도, 우리 학교 복도에는 베란다가 있었다. 보통 베란다에는 청소 용품을 잔뜩 쌓아 두는데, 남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할 때나 나갈 뿐이었다.  나는 괜스레 울적해질 때마다 이제 학년이 올라가면서 다른 반이 된 손을 찾아가곤 했다. 손은 그러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복도 베란다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어깨를 아플 정도로 꾹 눌러 억지로 주저앉혔다.  그렇게 둘이 복도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운동장에서도 복도에서도 우릴 찾을 수 없었다.  복도와 베란다 사이의 문을 닫으면, 모든 소리마저 차단되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닫으면, 우린 또 새로운 담을 넘은 것이나 마찬가지 었다.  비록 분식집은 갈 수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 둘만의 작은 세계가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예민함과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 미술 공모전에서 상을 못 탔다는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 일들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들이 많아지니 손은 복도 베란다에 나갈 때면 아예 휴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손이 나를 따스하게 달래주었던 것도 아니다.

손의 위로에는 욕설이 난무했다.


"너는 눈물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한심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를 내가 진심으로 째려보고 나면 그때서야 조금 더 사근사근 해지는 위로의 말들이 이어졌다.  

"대충 흘려버려, "

"얼마나 잘 사려고 그래. 나중에 커서 나 일자리 주려고 그러지."

"심사위원들이 보는 눈이 없네. 내가 봤을 땐 네가 일등 감이었네."


손이 몇 차례 더 농담을 하고 나면, 나는 어느덧 눈물로 퉁퉁 부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럴 때면 손이 어김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네가 여자라서 이런 말은 안 할라 그랬는데.. 너 그렇게 자꾸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항상 반복되는 레퍼토리처럼, 손이 엉덩이 털 나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면, 어느새 내 슬픔은 온 데 간데없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손과 함께 숨어 있던 복도 베란다는 나의 작은 대나무 숲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대나무 숲이었다.  나의 속상한 감정을 훌훌 털어놓고 나면, 손의 구수한 욕설이 나오던 시답지 않은 농담이 튀어나오건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욕설은 기분 나쁘지 않았고 농담은 어느새 나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1평 남짓 작은 복도 베란다에서 손은 손쉽게 내 슬픔을 웃음으로 흘려보내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날도 있었다. 고 3 때로 기억한다. 여느 때와 다르게 손이 먼저 내 반으로 찾아왔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고 얼굴마저 창백한 듯했다. 손까지 파르르 떨길래 얼른 우리의 작은 대나무 숲으로 데리고 나갔다. 손이 언제나 그러하듯,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쭈그려 앉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에, 손은 입을 열었다. 손의 어머니가 수술을 하신다고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얘기조차 웃으면서 하는 그였다.  손이 처음으로 나라는 대나무 숲에, 그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불안감과 걱정과 왠지 모를 죄송함이 뒤섞인 미묘한 떨림.  손은 몇 마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되려 급격하게 적어진 그의 말수에서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는 대나무 숲은 형편없었다. 아무런 농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힘없이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난처해할 뿐이었다. 나에게는 손의 슬픔을 흘려보낼 재주가 없었다.


대신 울었다.  그것도 목놓아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니 축 쳐져 있던 손이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네가 왜 우니?"

"몰라, 엉엉..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엉엉"


더 큰 고민을 안고 찾아온 그의 앞에서, 나는 '나에게는 손을 위로해줄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엉엉 울었다.  손은 정말 어이없다는 듯 크게 한 번 콧웃음 치고는 얘기했다.

"넌 진짜. 문제 있는 것 같아. 감정 장애.. 이런 거"

다른 때와 달리 손을 째려볼 여유조차 있지 않았다. 내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하자,  손은 그런 나의 정수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애초에, 너한테 위로받으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런데 기분이 좀 나아졌다, 고마워."

그러고 우리는, 정확히 하면 나는 그러고도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다.





다행히 손의 염려와, 내 눈물이 무색할 만큼 어머니의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몇 차례 더 대성통곡을 할 만한 일들이 있었지만 (시험을 못 봤다거나, 상을 못 탔다거나 등의 일이었다.), 대체로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나는  정말 자주, 종종 손을 대나무 숲 삼아 꺼이꺼이 울었지만,  학창 시절 내내 손이 진지해진 것을 본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아까 이야기한 어머니가 수술할 적이고, 두 번째는 그가 재수를 하겠노라 이야기했을 때 었다.  수능을 보고 며칠 후었는데, 그날도 그가 먼저 내 반으로 찾아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그의 비장한 각오가 평소의 모습과 너무 달라 그랬던 것인지, 눈물 대신 헛웃음만 났었다. 너무 진지해서, 손이 항상 나에게 그랬듯이 그렇게 놀리고 싶었었다.

"그래, 뭐.. 잘해봐라. 야.. 근데 너 좀 힘들게 해야겠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이 되려 나를 앙칼지게 째려보았다. 그제야 나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야, 네가 재수하면 잘될 거라는 거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놀릴 수 있는 것 아냐.

 무조건 잘될 거야. 무조건."

 진심이었다.  손이 언제나 나에게 그랬듯, 마음속에 있는 감정 그대로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나처럼 좀 잘하지 그랬니' 라며 괜히 재수 없는 농담도 몇 개 덧붙였다. 어느새 손과 나는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느새 나에게도, 손의 슬픔을 웃음으로 흘려보낼 재주가 생겼다.




손은 결국 재수를 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학교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대학교에 가서도, 종종 동네 카페에서 만나 같이 과제를 하고, 저녁에는 그 밑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곤 했다.  손은 군대를 다녀왔고, 나는 파리에도 다녀왔다.  담을 넘거나, 복도 베란다에 쭈그려 앉을 필요 없이 우리는 울적한 날이면  맥주 한 캔을 사들고 한강에 가곤 했다.  우리의 고민의 주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다양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웃음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3년이라는 시간의 세 곱절 보다도 더 긴 시간을 같이 크게 되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당연히 전세 대출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만기 두 달을 앞두고 나는 더 이상 전세대출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높은 금리에, 너무 적은 대출금이 문제였다. 은행이 보기에 나 같은 프리랜서는 무직자보다도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되나 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이의 서러움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손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손은 방도 빼는데, 전세 대출 걱정이 웬 말이냐며, 월세를 구하지 않으면 되냐고 다독인다.  

"야야, 그만 울어. 내가 대출받아줄게. 나는 안정적인 직장이니 대출 많이 나올 거야."

".. 아 물론, 내가 직장을 구하고 난 후에^^"


손의,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들으니 괜히 헛웃음이 났다.  '곧' 안정적인 직장에 다닐 손 덕에 대출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니.  이 참에 각서라도 쓰자고 했다. 취업하면 꼭 나한테 돈 꿔줘야 한다고 말이다.

손은 각서 쓰기를 애써 거부하고, 산책이나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익숙하게 자취방 뒤편의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약간은 으슥한 그 골목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갑자기 한강공원이 나온다.  여의나루처럼 '오세요' 하는 깔끔하고 예쁜 공원은 아니고,  아무렇게나 자란 덤불에 중간중간 끊기는 산책로가 있는 어설픈 공원이다.  합정역 뒤편의 이 숨은 장소를 보고 있노라면, 서울을 가로지르는 그 긴 한강 주변 경관을 다 꾸미기에는 역시 무리였구나 싶다.  각설하고 - 우리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긴 공원의 한 구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약간 비릿한 한강 내음이 코를 찌르는데도, 멀리 보이는 양화대교의 불빛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내가 갑자기 양화대교 노래 가사를 읊조리니, 손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본다. 음이 하나도 안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손수 바이브레이션까지 넣어가며 시범을 보인다. 이에 질세랴, 나는 더 크게 따라 불렀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다음 가사를 모르는 우리는, 어느새 같은 구절만 목이 쉬어라 몇 번 반복했다.  눅눅한 여름 공기를, 한강 저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씩 저 멀리 보내곤 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몇 번에, 방금까지도 마음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았던 몇 가지 생각들을 밤바람에 흘려보낸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담을 넘는다.


사진출처 : https://www.sphinfo.com/sph-hangout/



추신.

십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 친구 저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이 섞인 것도 같기도 합니다 ^^;;
글을 발행하기 전에 손에게 보여주었는데, 미화된 추억이 너무 많다네요.

+ 덧붙여, 자습시간에 도망칠 때는 학원간다고 거짓말을 하면 쉽게 자습실건물 밖을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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