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사람과는 한 마디도 하지 않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dreams

by 이원율

회색 나시와 청바지를 입은 20대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선글라스가 목덜미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나와 아내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받으러 잠깐 간 사이, 우리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짐을 풀었다. "죄송해요. 여기 자리가 있어서요." 그는 그제야 내가 떠나기 전 혹시나 해 의자에 살짝 올려놓은 겉옷을 발견했다. "미안해요. 내가 차마 못 봤어요." 화들짝 놀란 그는 외국인이었다. 그는 내가 더 미안해질 만큼 꾸벅 사과하고는, 한 칸 건너 있는 빈자리에서 다시 소지품을 정리했다.


나와 아내가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동안, 그는 머그잔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음미했다. 무선 이어폰을 낀 그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훑어보고, 펜과 엽서를 꺼내 무언가를 끄적였다. (당연히도)외국어로 쓰인 소설책을 꺼내 오른 다리를 꼰 채 문장을 쭉 따라갔다. 턱을 손에 괸 채 지그시 눈을 감더니, 때로는 창문을 통해 건물과 차, 사람들을 성실히 살펴봤다. 내가 아내를 보는 방향에 그가 있어서였을까.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 그는 여행자였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쓰는 중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된 아내를 만나기 전, 나는 취업을 한 후 1년에 두어 번 얻게 된 휴가에서 열 중 아홉은 혼자서 지냈다.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아이러니하게 타고나길 사람에 쉽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휴가지에서는 잔잔히 보내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관계와 인연을 놓고 눈이 충혈될 만큼 지쳤을 때는 휴가 중 목표를 '사람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기, 개와 고양이는 제외'로 못 박기도 했다. 내게 잠깐 주어지는 이 시간은 재충전을 위한 소중한 쉼표였다.


직장인으로의 휴가 첫날, 홀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한여름 소금 향이 물씬 묻어나는 섬에 온 후 가장 먼저 간 곳은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는 가게였다. 당시 비행깃값이 부담됐던 나는 집 장만을 하기 전까지는 아시아를 넘어서의 국경은 밟지 않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던 때였다(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였다). 3박 4일의 기간,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기 전, 오토바이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 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기 국수를 사주기는 했다. 일독에 시달렸던 나는 평소보다 살이 5~6kg은 빠졌었다. "멀쩡하게 생긴 애가 어디에 홀렸다가 왔는지 너무 멍해 보여서.... 딱하기도 하고." 그 형은 얼마 전에서야 내게 온정을 베푼 이유에 대해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래, 그때 내 상태는 그만큼이나 말이 아니었다. 4일 내내 입 닫고 두 개의 바퀴로 꾸준히 해안도로를 달렸다.


다른 사람들은 더워서 오지 않는다는 8월 중순의 여름, 제주도의 해안도로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봤다. 바다가 따로 없었다. 하늘이 바다였다. 까치발을 세우면 그대로 하늘에 잠겨 젖을 것 같았다. 흰고래가 지느러미를 휘적대며 헤엄치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면, 온 세상이 그대로 푸른 물에 잠길 것 같았다.


혼자 있는 그 4일간 하늘만 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바빴다. 비로소 해야 할 일이 밀리고 나니, 되레 하고 싶던 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는 휴가의 묘미기도 했다. 많은 꽃의 향을 맡았다. 마음에 드는 조용한 길목에선 아예 길바닥에 퍼질러 누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파도가 일렁이는,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를 실컷 봤다. 귤과 땅콩으로 만든 것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봤다. “나 자신을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보다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겠지요.”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산속에 있는 절에서 흰 눈썹의 노승(老僧)이 “스님이 제 나이라면 무엇을 할 건가요”라는 내 우문에 건넨 현답을 떠올렸다. 속세에서 벗어나, 매 순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4박 5일, 나를 통해 나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그사이 혼잣말이 늘었다. 모두 내 메모장에 담길 글의 조각들이었다. 어느 날은 오토바이를 타고 한참을 나밖에 없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가장 미워하는 상사 한 명을 떠올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갖은 말을 외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주·조연들이 슬금슬금 생각날 때쯤 육지로 돌아왔다. 얼굴과 양쪽 손등이 까맣게 탄 상태였다. 화상 연고를 발라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5일의 장면 덕분에, 나는 몇 달간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우린 호스트와 게스트로 만났지만, 다음에 또 볼 적에는 친구예요. 숙박비는 안 내도 돼요. 즐거운 홈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 다시 놀러 오기나 해요.”


아이러니하지만, 가끔은 혼자 갔기 때문에 기적 같은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역시 입 꾹 다물고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 도심에서 꽤 떨어진 한 2층 주택을 숙소 삼아 하루를 머물렀다. 삼십 대 후반의 부부가 호스트였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한 후, 할당된 2층 방에 짐을 풀고 곧장 근처의 작은 카페를 찾아갔다. "정말 미안한데…. 혹시 어디세요." 홀로 책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호스트에게 온 문자였다. 정신 차려보니 늦은 오후였다.


곧 차편이 끊길 것 같았다. "금방 들어갈게요." 답장을 한 후 곧장 숙소로 돌아갔을 때, 이 부부는 마치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양 반가워했다. 두 사람은 나를 코타츠 테이블에 밀어 넣고(?) 차와 음식, 과일들을 주렁주렁 데려왔다. 오사카는 처음인지, 일본의 여름은 어떠한지, 오늘은 어떤 곳을 둘러봤는지, 혹시 교토의 '철학자의 길'은 가봤는지를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물어봤다. 그런데도 이들의 태도가 워낙 조심스러웠던 탓에 질문 세례가 불쾌함을 느낄 틈은 없었다. 치즈색 고양이 두 마리가 두 마리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번갈아 가면서 머리를 내 옆구리에 비비적댔는데, 그럴수록 마음만 누그러질 뿐이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좋아했다. 특히 실레의 경우, 일본의 몇몇 소도시에서 직접 전시를 기획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당시 여행에서 내가 책 벗으로 함께 가져온 아이는 실레의 시와 그림이 담긴 책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빈센트 반 고흐의 일대기를 소설로 재구성한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였다. 두 사람은 내가 거실에서 이런 책들을 가방 안에 바리바리 싸는 것을 보고 호기심을 느꼈다고 했다. "혼자 여행을 와서는 미술책만 들고 밖으로 나간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혹시 실레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실레의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를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이들은 나를 유리잔 다루듯 섬세히 대했다. 아무리 입 닫고 있기로 한 여행이라지만, 그런 예(禮)에 마음이 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했다. 밤하늘이 짙은 남색이 된 것으로 봐선 새벽 2시가 족히 넘었을 때였다. 그사이 아낀다는 사케를 두 병이나 비웠다. 나는 이들에게 폴 고갱의 삶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설 《달과 6펜스》를 권했고, 이들은 내게 문장 하나하나가 예술적이었던 소설 《나는 알고 있다, 이것만은 진실임을》을 추천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그곳에 실레 책을 두고 오기로 했다.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정말로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어와 서툰 일본어를 섞어 쓴 손편지와 함께.


두 사람은 내게 종종 안부를 전해왔다. 나도 책과 전시 등에서 만난 그림 중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잊지 않고 공유를 했다. 알고 보니 상·중·하로 나뉜 대서사시였던 《나는 알고 있다, 이것만은 진실임을》도 독파했다(솔직히 말하자면 내용도 쉽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독일 화가 마르크스 슬레포크트의 그림을 놓고 서로의 감상평을 주고받았다. "그때 참 좋았는데. 꼭 와요." 만약 내가 혼자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그런 숙소를 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책은커녕 일행들과 함께 맛집 지도나 들고 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엄마, 난 혼자였기 때문에, 내 여행은 더 풍요로웠어요."


발길 닿는 대로 간 제주도의 한 숙소의 사랑방, 그곳 한쪽 면에 붙어있던 폴라로이드 사진 아래 쓰인 문구였다. 게시판의 귀퉁이에,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방해라도 될 듯 조심스레 매달려 있었다.


노란색 단발머리를 한 앳된 표정의 여성이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빼빼 마른 그녀는 자기만큼 큰 배낭을 둘러매고 자랑스레 'V'를 하는 포즈였다. 이 사람도 분명 새로운 나 자신을 만났거나, 때로는 기적 같은 인연을 만났을 터였다. 그 아래에 포스트잇으로 댓글을 달았다. “혼자 오른 여행길이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지요. 용기를 응원해요.”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dreams 1896 oil on canvas 160 x 135 국립현대미술관 로마 이탈리아.jpg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dreams

"홀로 있는 당신의 상태를 유지하라. 그들의 혼돈으로 들어가지 말라…도움을 마다하고 홀로 섰을 때 강해질 수 있다." 《세상의 중심에 너 홀로 서라, 랄프 왈도 에머슨》


한 곳을 본다기보다는, 한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녀는 완벽히 혼자입니다. 녹색 모자와 노란색 표지의 책 몇 권을 색이 바랜 벤치 위 살포시 올려놓고는, 이와 함께 자아도 푹 내려놓았습니다. 내려오는 이파리, 부스럭거리는 꽃잎도 이미 세상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옆을 지나갈 땐 숨소리도 낮춰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 스스로 이 순간을 택했습니다. 무리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장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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